[단독/납북 메구미, 약물 과다투여 사망]“정신병동 수용… 死後 온몸에 청색반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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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사망 목격 北병원 근무자 증언’ 극비문서 입수



메구미 친아버지와 시어머니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 씨(왼쪽)가 2006년 5월 서울 송파구 수협중앙회 강당에서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 씨의 어머니 최계월 씨와 손을 맞잡고 있다. 메구미와 김 씨는 1986년 북한에서 결혼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메구미 친아버지와 시어머니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아버지 요코타 시게루 씨(왼쪽)가 2006년 5월 서울 송파구 수협중앙회 강당에서 한국인 납북자 김영남 씨의 어머니 최계월 씨와 손을 맞잡고 있다. 메구미와 김 씨는 1986년 북한에서 결혼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와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일본 납북자 문제의 상징인 요코타 메구미(橫田惠)의 사망 배경을 공동 조사한 극비 보고서에는 북한 당국이 자행한 인권 유린 등 비참했던 메구미의 북한 내 생활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A4 용지 9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일본 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가 만든 7개 질문에 증언자들이 수기(手記)로 답변하는 형태로 작성됐다. 보고서 마지막에 ‘일본정부 납치문제대책본부 사무국’이 만든 문건임을 명시했다. 그 아래에 일본 납치문제대책본부 관계자 3명과 최 대표의 이름을 함께 적시했다. 보고서 원본은 일본 정부가 갖고 있으며 한국 정보당국도 사본을 확보했다. 다음은 보고서 전문이다. 》
■ “병원 왔을때 건강 좋았지만 심한 조사로 악화”

[1] 그 여성이 일본인 납치 피해자 요코타 메구미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요코타 메구미는 언제 어디서 봉화진료소로 왔습니까? 요코타 메구미가 왔을 때 그의 정신 및 신체 상태는 어땠습니까?

“병력서(진료기록서)에 류명숙 녀자(여자) 1964년 10월 5일생. 1977년 일본에서 조선(북한)으로 붙잡혀 들어왔고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건강상태, 정신상태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심한 조사를 받으면서 건강 상태가 나쁘게 되여(되어) (국가안전)보위부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저에게 일본에 있는 고향 주소를 알려주면서 자기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봉화진료소는 이 녀성(여성)이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평양의 고급간부 전용병원 메구미의 북한 이름 ‘메구미가 있던 병원’이 봉화진료소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것)

“약물 먹기도 하고 주사 맞기도 해”

[2]
요코타 메구미의 주치의는 누구였고 어떤 경력을 가진 의사였습니까? 그 주치의는 메구미에게 어떤 치료를 했습니까? 요코타 메구미의 간호를 담당한 다른 간호원이 있었다면 성명과 주소, 직업과 지위를 설명해 주십시오.

“그 일본 녀성은 정신과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담당한 주치의사는 남 선생이었습니다. 정신병 약인 정신진정제, 수면제 약물을 위주로 먹기도 하고 주사받기도 하였습니다. 토요일 일요일 명절날에는 의사 간호원들이 교대하여 근무하였습니다. 평양시 **구역 **동 **반 ○○○”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증인 2명 중 1명”이라고 말했다. 증언자의 안전을 위해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

“밤마다 ‘아버지 어머니’ 부르며 서럽게 울어”

[3] 요코타 메구미는 진료소에서 하루를 어떻게 지냈습니까?요코타 메구미와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요코타 메구미를 병문하거나 병세를 확인하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있었습니까?

같이 끌려온 남자와 결혼하여 일본에서 조선에 들어온 사연, 고향에 있는 부모님 이야기, 조선(북한) 간부들이 조선에서 교육받은 후 일본으로 다시 보내준다고 약속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약속대로 부모님께 서신을 보내고 련락(연락)하자는 문제를 가지고 심하게 다투었고 그 후 남편이 그 녀자를 멀리하였다고 합니다. 밤이 되면 부모님을 찾는 서러운 울음소리(오상오상)가 들렸습니다. 국가보위부가 수시로 감시하였고 방문자도 차단하였습니다. 해외동포영접부 사람들도 가끔 들르기도 하였습니다. 인민반장과 주변사람들 중에 비밀정보원을 잠입시켜 감시하였습니다. 그 녀성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에는 특별히 격리병동에 따로 입원하였습니다. 그 정신병원은 기차역에서 도보로 몇 시간 걸어야 갈 수 있는 산골짜기에 있었습니다. 간혹 탈출할 수도 있고 그러면 주택 주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외진 곳에 병동을 지었다고 합니다.”

(1978년 납북된 한국인 김영남 씨 ‘오토상(아버지)’, ‘오카상(어머니)’을 잘못 들은 것으로 보인다. 평양 49호 예방원)

“진정제-수면유도제 등 치사량 가깝게 투여”

[4] 요코타 메구미에게 어떤 약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느 정도 투약했습니까?

디아제팜(Diazepam) 0.002 1정 용량. 1일 2∼3회 1회 2정∼5정 내복. 정신환자의 진정 목적으로 처방. 하이미날(Hyminal) 0.1 1정 용량. 1일 2회 1회 2∼4정씩 내복. 강력한 수면작용 있음. 5정 이상 투여 시 20여 시간 수면 유도할 수 있고 10정 이상 투여 시 치사량이 될 수 있음. 아미나진(aminazin) 알약(Tab) 주사(inj)로 각각 처방받음. 주사 2ml∼5ml 정도 주사(근육주사함). 진정 및 수면유도 작용함. 치사량이란? - 생명을 잃을 정도의 과량을 의미함.”

(정신안정제 신홍범 코슬립수면센터 원장은 “하이미날은 5mL 짜리를 하루 최대 8번 복용하면 40mL로 이는 상당히 높은 투여량이며 치사량 수준이다. 노인이나 몸이 약한 사람들은 하루에 10mL만 먹어도 많이 복용하는 셈이다. 하이미날은 호흡을 억제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말했다. 신경증이나 정신병에 쓰는 진정제의 일종. 북한식 표현임)

“사망하자 보위부-黨 지시로 구덩이 파고 묻어”

[5]
요코타 메구미가 사망했다면 어떤 원인으로 언제 사망했습니까? 요코타 메구미가 죽었을 때 곁에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있었으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요코타 메구미가 죽은 후에 시신을 처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요코타 메구미의 시신이 어떤식으로 처리됐다 등 들은 바가 있습니까?

“저는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본 병원에 근무하였습니다. 그 환자는 1994년 4월 10일 사망하였습니다. 며칠 후 4월 15일 산에 묻었습니다. 시체는 (국가안전)보위부와 당 조직의 지시로 산에 직파하였습니다. 직파란 관도 없이 그냥 구뎅이(구덩이) 파고 그대로 묻는 것을 말합니다. 뜨락또르(트랙터) 적재함에 다른 시체 5구와 함께 싣고 같은 곳에 묻었습니다. 당일날 의사 1명 간호원 1명 간병원 5명이 처리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녀자 환자가 죽었을 당시 온몸에 청색 반점이 있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망 환자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소견입니다. 독극물이나 지나친 용량의 약물을 먹거나 주사했을 때 볼 수 있는 소견으로 알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의는 “독극물이나 약물을 과다 복용하면 온몸에 청색 반점이 생길 수 있다. 독극물이 담긴 약물로 피하 치료 등을 시도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출혈 부위가 푸르게 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법의학 전문가들은 “시반 색깔만 가지고 사인을 추정하는 건 어렵다”는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 밖에서 자물쇠 채워”

[6] 봉화진료소 소재지는 어디입니까? 봉화진료소 및 그 부속 시설들의 위치관계를 그림으로 그려주십시오. 북조선은 요코타 메구미가 입원한 것은 49호 예방원이라고 주장했었는데 봉화진료소와 49호 예방원은 같은 시설입니까? 요코타 메구미는 진료소 몇 동 몇 층 몇 호실에 있었습니까? 봉화진료소 전체의 의사 간호원 입원 환자 수는 몇 명 정도였습니까?

“(봉화진료소와 49호 예방원은 같은 시설이) 아닙니다. 평양시 49호 병원(예방원). 평양시 **구역 **리 **1동 **반 ○○○. 의사 10명 간호원 11명 간병원 15명 경리과 직원 4명 약국 직원 3명 식당 식모 3명. 격리병동(입원실) 특별격리병동은 따로 있었음. 남자 병동 여자 병동. 침대 수는 모두 100개. 1개 호실에 2∼5개 침대가 있고 침대가 없는 장판 호실도 있음. 1인용 호실도 있음. 식당, 병원장실, 의사실, 간호원실, 처치실, 주사실, 청년학교, 비서실, 경리과가 있었음. 완전 격리병동에는 의식장애가 심한 환자들이 따로 격리되어 있음. 매 호실에는 출입문에 밖에서만 열 수 있는 자물쇠가 있음. 식사는 심한 환자들은 운반 식사하고 경한 환자들은 식당에 와서 먹습니다.

(증언자 2명 중 또 다른 인물 이 말을 한 뒤 병원 시설들을 그림으로 그렸음)

[7] 요코타 메구미 이외의 다른 일본인 납치 피해자에 대해 보거나 듣거나 한 적은 없습
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2014년 9월 11일.”

윤완준 zeitung@donga.com·정성택·최지연 기자
#납북 일본인#요코타 메구미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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