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편결제’ 美보다 먼저 하고도 시장 뺏길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5일 03시 00분


코멘트

[‘핀테크’ 금융혁명이 온다]<2>규제에 꽁꽁 묶인 한국

토종(土種) 온라인 서점 ‘알라딘’은 전자결제대행업체(PG사) ‘페이게이트’와 손잡고 올해 9월부터 공인인증서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간편결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소비자가 이 서점에서 간편결제로 책을 구매하려면 해외 카드사에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사정은 이렇다. PG사가 국내에서 간편결제 서비스를 하려면 카드사들과 제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카드사들은 보안사고가 나면 그 책임을 자칫 자신들이 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공인인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페이게이트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페이게이트의 간편결제 방식은 1억5000만 원을 들여 금융당국에서 보안심사까지 통과했지만 현행법상 인증방식의 선택권을 가진 카드사들이 선택하지 않는 이상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페이게이트는 해외 카드사인 비자, 마스터카드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가 내야 하는 1%가량의 수수료는 페이게이트가 회삿돈을 들여 캐시백으로 보상하고 있다. 박소영 페이게이트 대표는 “미국의 페이팔보다도 먼저 간편결제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규제 때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페이팔 등 외국 간편결제 업체에 국내 시장을 내주게 생겼다”며 “결제 인증방식의 다양화를 위해 문제제기를 한 공로로 2010년 정부로부터 ‘규제개혁 유공자’ 훈장도 받았는데 훈장을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 수리가 필요한 낡은 규제들

전문가들은 스마트금융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들을 융통성 있게 보완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1993년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법에 따라 은행 등 금융회사에서 계좌를 만들거나 대출을 받으려면 본인 확인을 위해 이용자가 직접 점포를 방문해야 하는데 이는 스마트폰 뱅킹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에 비해 해외의 인터넷 전문은행들은 점포 없이도 온라인이나 모바일로 금융거래 서비스를 자유롭게 제공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국내에서도 인터넷은행에 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 문제 때문에 번번이 도입이 무산된 바 있다.

업계에서는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금융실명제의 순기능을 살리면서도 핀테크 산업 발전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제의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차문현 펀드온라인코리아 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디지털 금융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만큼 한국도 점포 중심의 금융 규제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금융 소비자의 신원을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산(金産)분리 정책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금은 국내 정보기술(IT) 업체들이 새로운 형태의 금융 서비스를 독자적으로 하는 게 불가능하다.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을 봉쇄한 금산분리 규제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핀테크 업체들은 기존 금융사와 협업을 선택하는 길밖에 없다.

해외에서는 구글이나 이베이, 알리바바 등 IT 기업들이 결제·송금, 대출 등 기존 금융사들의 영역에 독자적으로 진출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금융회사와 경쟁을 하면서 금융산업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바일 결제서비스 카카오페이의 경우 8월 개발이 마무리됐지만 모바일 결제 시장의 주도권이 IT 업체로 넘어갈 것으로 우려한 카드사들의 비협조로 서비스 개시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카카오 관계자는 “카드사들의 보이지 않는 견제 때문에 일단 일부 카드사하고만 제휴를 맺은 뒤 서비스를 내놔야 했다”고 말했다.

○ “규제 완화와 함께 부작용 감시해야”

창업 규제도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해 손질을 해야 하는 규제로 꼽힌다.

현행법상 모바일 결제 수단인 전자화폐발행업은 50억 원, 티머니처럼 미리 돈을 충전해 사용하는 선불전자지급업은 20억 원의 자본금 규제 문턱을 넘어야 한다. 또 인터넷 전문은행 역시 최소 자본금 기준이 기존 은행들과 똑같은 1000억 원으로 규정돼 있다. 웬만한 신생 업체는 초기 투자비용을 마련하기도 버거운 형편이다.

에인절투자업체 퓨처플레이의 신재은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영국에서는 리스크 관리에 대한 청사진만 뚜렷하면 자본금에 대한 별다른 규제 없이 금융 관련업을 창업할 수 있다”며 “한국도 창업이 활발해질 수 있도록 자본금 외에 다양한 기업 평가 항목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핀테크 산업의 발전을 위해 규제를 풀어야 하겠지만 규제 완화로 금융거래의 안전성이나 개인정보 보호 문제가 소홀히 다뤄지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정근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IT 업체와 전자상거래 업체 등 다양한 산업이 모바일 금융에 뛰어들고 있는 만큼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해 금융빅뱅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당국은 금융안정성 확보와 보안 강화에 힘써야 한다”고 덧붙였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직접 업체들을 만나 핀테크 발전을 위해 필요한 규제 완화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 >

팀장=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
팀원=
유재동 정임수 김재영 신민기 송충현 박민우 기자 (경제부)
#핀테크#간편결제#규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