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나 심는 옥상텃밭? 오감만족 힐링텃밭!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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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기획]도시농부 88만명 시대

농사를 반드시 농촌에서만 지으라는 법은 없다. 최근 들어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시티 파머’가 늘고 있다. 올 6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마르쉐’ 도심장터 참가자들이 자신이 직접 키운 채소를 판매하는 모습. 동아일보DB
농사를 반드시 농촌에서만 지으라는 법은 없다. 최근 들어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시티 파머’가 늘고 있다. 올 6월 서울 종로구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마르쉐’ 도심장터 참가자들이 자신이 직접 키운 채소를 판매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서울에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다는 거야?”

“대형마트나 시장에 가면 채소가 널렸는데 굳이 왜 자기가 농사를 짓는다는 거지?”

서울 마포구 홍익대 인근에서 농사를 짓는 박정자 씨(49·여)는 곧잘 이런 질문을 접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을 자신의 ‘삶의 터전’인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2길 가톨릭청년회관 건물 옥상 ‘다리텃밭’에 초대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220m²(약 67평) 넓이의 옥상에 올라서면 스피아민트와 차이브, 레몬그라스, 레몬밤 등 허브가 심어진 상자 텃밭이 빼곡하게 놓여 있다. 처음엔 자신이 길러서 먹기 위해 시작했던 농사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은 회원들과 함께 농사를 지을 정도가 됐다.

박 씨는 옥상 농장에서 수확한 작물들을 인근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납품한다. 당일 딴 채소를 바로 넘기다 보니 레스토랑 셰프들이 “도매시장의 채소보다 신선하고 가격도 싸다”고 입을 모은다.

박 씨는 일반 고객에게도 채소를 판다. 옥상에서 수확한 재료로 오이피클과 레몬잼, 허브비누 등 농산물 가공품을 만들어 서울 양재동의 주말 도심 장터인 ‘마르쉐’ 등에서 판매한다. 마포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라는 뜻에서 ‘Made in Mapo’의 약칭인 MIM 브랜드를 붙였다.

얼마 전에는 배추와 양배추, 허브를 추가로 심었다. 회원들과 11월 김장철에 김치를 담가 먹을 작정이다. 박 씨는 “올바른 농업은 올바른 식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며 “신선한 음식을 먹으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도시농사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 씨와 같은 시티 파머(도시농부)가 늘고 있다. 시티 파머란 말 그대로 도시의 건물 옥상이나 공터, 공원, 주차장 등을 텃밭으로 활용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도시농부, 3년 내 100만 명 돌파할 듯

시티 파머는 전통적인 의미의 농부와는 다르다. 대개 농부라고 하면 농촌에서 농사짓는 어르신들을 떠올리지만, 도시농부 중에는 30, 40대가 적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250만 명에 이르던 전통적인 고령 농부가 매년 15만∼30만 명씩 줄고 있다. 하지만 시티 파머 수는 매년 증가세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시티 파머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88만5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2010년(15만3000명) 이후 3년 사이에 5.8배로 급증했다. 농식품부는 지금 같은 추세라면 2017년에는 시티 파머가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도시농업이 트렌드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대표적인 예다. 오바마 대통령 부부는 백악관에 ‘키친 가든’이라는 텃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다. 수확한 농산물은 백악관의 식자재로 쓰거나 푸드 뱅크에 기부한다. 2011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의 시티 파머는 약 8억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 인구(70억 명)의 12% 정도다. 특히 유럽이나 북미, 일본 등 선진국에 시티 파머가 많다.

국내에서는 2005년경부터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시티 파머들 사이에서는 ‘상자텃밭’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이 ‘티핑포인트(변곡점)’로 통한다. 그 덕에 농사는 땅에 지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깨졌기 때문이다. 2011년에는 ‘도시농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도시농업에 대한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 이후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도시농업을 지원하기 위한 조례가 잇따라 만들어졌다.

전국에 조성된 도시텃밭은 5만4805개(지난해 기준)에 이른다. 면적은 564ha(약 170만 평)로 2010년(104ha)의 5.4배로 늘었다. 2017년에는 도시텃밭 면적이 1500ha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시티 파머들은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먹기 위해 직접 채소를 기른다. 올해 9월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2길의 한 건물 옥상에
 조성된 ‘다리텃밭’에서 시티 파머들이 ‘가을 텃밭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인근의 레스토랑 셰프들이
 ‘다리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우엉, 당근, 고구마로 만든 요리를 내왔다. 다리텃밭 제공
시티 파머들은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먹기 위해 직접 채소를 기른다. 올해 9월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2길의 한 건물 옥상에 조성된 ‘다리텃밭’에서 시티 파머들이 ‘가을 텃밭의 재발견’을 주제로 한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는 인근의 레스토랑 셰프들이 ‘다리텃밭’에서 기른 호박과 우엉, 당근, 고구마로 만든 요리를 내왔다. 다리텃밭 제공
내가 길러 내가 먹는다

시티 파머는 팔기 위한 농업보다는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을 하는 게 특징이다. 자신이 먹거나 주변 사람들과 나눠 먹기 위해 작물을 재배한다. 농사에 대한 관점도 다르다. 이들은 농사를 애그리컬처(Agriculture·농업)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놀이)를 결합한 ‘에그리테인먼트’로 본다. 시티 파머들은 채소를 기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달 9일 오후 8시 서울 마포구 구수동의 5층짜리 건물 옥상에 젊은이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부분 도시 출신이지만 씨앗 종류와 채소 재배법 등을 줄줄이 꿰고 있는 이들이었다. 전화번호부 두께만큼 두꺼운 ‘텃밭백과’를 ‘열공’(열심히 공부)한 덕분이다.

이들은 옥상 바닥에 만든 밭에서 기른 채소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주메뉴는 바질을 넣은 만둣국. 껍질째 먹는 콩(그린 빈)을 잘라서 마늘과 함께 볶은 반찬도 곁들였다. 이들은 “방금 딴 재료로 만든 요리라 일반 식당에서 파는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이 모임은 2011년 대학생 10여 명이 모여 서울 노들섬의 텃밭에서 농사를 지은 게 계기가 돼 만들어졌다. 이듬해 한 카페 주인이 빌려준 건물 옥상에서 농사를 짓게 됐다. 서울시의 지원금과 소셜펀딩 등을 통해 모은 돈으로 바닥에 흙을 깔고 배수시설을 했다. 지난해에는 ‘파절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 인가를 받았다.

이들은 빗물을 모아 밭에 물을 주고 음식물 쓰레기를 퇴비화해 거름으로 쓴다. 현재 토마토, 당근, 고구마, 바질, 고수 등 50∼60종류의 작물을 기르고 있다. 현재 조합원은 200여 명에 이른다. 15m²(약 4.5평)였던 밭 면적이 지금은 50m²(약 15평) 규모로 늘었다. 회원들은 자신이 시간이 있을 때 자유롭게 밭에 와서 농사를 짓는다. 매주 오는 사람도 있고, 서너 달에 한 번 오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기업들도 시티 파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의사당대로의 현대카드 본사 사옥 옥상에는 텃밭과 함께 호미 등의 농기구, 밀짚모자 등이 놓여 있다.

이 회사는 한강과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토마토, 오이, 호박, 파프리카, 가지, 고추, 블루베리, 바질, 로즈마리, 레몬 버베나, 당근, 비트, 치커리, 상추 등 40여 종에 이르는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올해 6월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구내식당 조리사들이 매일 아침 이곳에서 딴 식재료로 아침식사를 만든다. 수확한 작물은 파스타와 샐러드에 쓰인다. 허브 종류인 애플세이지와 스피아민트는 ‘홈메이드 허브티’로 만들고 간식으로 그만인 치아바타 빵에도 허브가 들어간다. 휴식하러 옥상에 올라온 직원들은 블루베리와 토마토 열매를 따먹으며 잠시나마 자연을 느낀다.

농사로 치유 받다

시티 파머들은 농사를 통해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받기도 한다. 매주 도심에서 농사를 짓는 회사원 윤미화 씨(27)에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심신이 지쳐가던 때가 있었다. 머릿속에선 ‘쉬고 싶다’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맴돌았다. 하지만 시골로 가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어떻게 들어온 회사인데’ ‘거기 가서 뭐 먹고 살지’라는 두려움도 컸다. 그러던 중 도심텃밭을 알게 됐다. 이후 그는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함께 농사를 짓고 작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메마른 마음에 위안을 얻게 됐다.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큰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바질을 심고, 꽃 피우고, 수확을 기다리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감회가 새로웠고 ‘아, 내가 생명을 탄생시켰구나’ 하는 생각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는 것 자체에 치유 기능이 있다”고 강조한다. 농사는 오감(五感)을 골고루 환기하고 달래준다. 식물에 물을 주는 소리(청각), 색깔과 모양(시각), 향기(후각), 농기구나 땅과의 접촉(촉각), 작물 맛보기(미각) 등이 모두 심신을 어루만져준다. 김태곤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사는 반복 작업이 많고 쉽게 체득할 수 있어 누구나 ‘작은 성공(Small Win)’을 하게 해 준다”며 “이런 경험은 자기 긍정으로 이어져 의욕을 고취하고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을 향상시킨다”고 말했다.

시티 파머들은 종종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한신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옥상에서 토마토, 오이, 고추, 상추 등을 기른다. 이곳의 ‘비치파라솔’은 즉석 반상회 장소로도 쓰인다. 주민들은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부르면서 언제든 채소를 들여다보고 과일을 따 먹는다. 특히 날씨가 좋았던 올여름에는 수박 200여 통과 참외 1200여 개를 수확해 과일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농사를 주도한 고창록 씨는 “아파트촌 특유의 서먹함이 없어졌고, 예전 농촌 마을의 분위기가 난다”고 말했다.  
▼ 맨해튼 빌딩숲 건너 4만㎡ 채소밭… “이거 합성사진 아니죠?” ▼

뉴욕 한복판 도심농장 ‘브루클린 그레인지’


미국 뉴욕에서 가장 큰 도심농장 ‘브루클린 그레인지’에서 수석 농부인 벤 플래너 씨가 직접 재배한 채소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 
농장에서 수확한 채소는 인근 식당이나 고객들에게 팔린다. 플래너 씨는 “도심의 방치된 옥상을 활용하면 도심농업도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뉴욕=김유영 기자 abc@donga.com
미국 뉴욕에서 가장 큰 도심농장 ‘브루클린 그레인지’에서 수석 농부인 벤 플래너 씨가 직접 재배한 채소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 농장에서 수확한 채소는 인근 식당이나 고객들에게 팔린다. 플래너 씨는 “도심의 방치된 옥상을 활용하면 도심농업도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뉴욕=김유영 기자 abc@donga.com
흡사 ‘합성사진’ 같았다. 미국 뉴욕의 허드슨 강가에 위치한 11층짜리 건물 옥상에 올라서니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거대한 채소밭이 펼쳐졌다. 채소가 심어져 있는 모습은 여느 농촌의 밭과 다름없었지만, 허드슨 강 건너편의 고층 건물과 강을 가로지르는 윌리엄스버그 다리가 도심 농장임을 실감케 했다.

이곳은 뉴욕 최대의 도심농장인 ‘브루클린 그레인지’. 4만여 m²의 옥상에 10여 개의 밭고랑 사이로 상추, 순무, 케일, 셀러리, 브로콜리, 토마토 등이 빼곡하게 심어져 있었다. 브루클린 그레인지의 벤 플래너 수석 농부는 밭고랑을 거닐며 케일 잎을 뜯어 씹으면서 기자에게도 내밀었다.

“농약을 쓰지 않고 친환경 퇴비로만 길렀기 때문에 씻지 않고 먹어도 안전해요. 신선하고 안전한 로컬푸드(지역에서 생산된 음식)에 관심이 많은 수요자들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케일을 맛보니 신선하면서도 쌉쌀한 향이 풍겼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작물은 연간 3t 규모에 육박한다. 뉴욕 일대의 레스토랑에 공급되며, 개인 고객에게 꾸러미 형태로 배송되기도 한다. 또 제철 채소를 넣은 소스 등의 가공식품으로 만들어져 브루클린의 파머스마켓(농부들의 직거래 시장)에서도 팔린다.

브루클린 그레인지는 산업공학을 전공한 플래너 씨가 2010년경 기자, 변호사, 회계 전문가,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지속가능한 삶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은 식물을 제대로 길러보기로 했다. 하지만 땅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뉴욕에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이들은 결국 건물 옥상으로 눈을 돌렸다. 대부분의 옥상은 그냥 방치돼 있었다.

다만 마땅한 건물 옥상을 빌리는 게 큰 숙제였다. 마침내 이들의 취지에 공감한 브루클린네이비야드개발공사가 1900년대 초반 미국 해군의 조선소 등으로 쓰였던 ‘네이비 야드’ 건물을 10년 동안 무상으로 빌려주기로 했다.

플래너 씨와 그의 친구들은 건물에 배수 시스템을 갖추고 하중을 줄여주는 가벼운 흙으로 밭을 만들었다. 밭이 생긴 후 브루클린 그레인지에는 꿀벌과 무당벌레, 새들이 날아들었다.

브루클린 그레인지는 도심 속의 농업 체험 공간 역할도 하고 있다. 플래너 씨와 친구들은 청소년 및 성인들을 대상으로 ‘시티 그로어스’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농사와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작물 기르는 법과 균형 있는 식생활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그동안 1만여 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브루클린 그레인지는 결혼식과 기업 모임 등 행사 장소로도 활용된다. 매주 2, 3차례씩 황금빛 노을을 배경으로 요가 교실이 펼쳐진다. 푸드 저널리스트 출신인 아나스타시아 콜 플래키어스 브루클린 그레인지 부대표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시티 파머의 증가세는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뉴욕=김유영 기자 ab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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