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 공연장 참사]40대 잉꼬부부 외출길 참변, 19세 아들 “내가 가장이라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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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사연들

검은 상복 차림의 딸(18)은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대신 근조화환의 국화를 어루만지며 멍하니 아빠의 영정만 바라봤다.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사흘째인 19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 차려진 윤병환 씨(47)의 빈소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아빠의 부재’ 앞에서 오열하던 딸은 눈물조차 메마른 듯 침묵을 지켰다.

윤 씨는 군대 간 아들과 고등학교 3학년 딸을 둔 가장이다. 그는 매일 승용차를 운전해 딸의 등하교를 함께했다. 대형마트 점원으로 일하는 아내의 퇴근이 늦으면 직접 딸을 위해 간식을 만들어 준 ‘딸 바보’였다.

윤 씨는 19일 군대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러 갈 예정이었다. 아들을 면회하는 날은 집안 잔치가 열린다. 가족과 친척 등 20명 가까운 일행이 늘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윤 씨는 며칠 전부터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오는 일요일에 우리 아들 면회를 가자”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싸늘한 주검이 돼 아들을 만나야 했다.

사고 현장 근처 건물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정연태 씨(47)와 부인 권복녀 씨(46)는 금실 좋은 ‘잉꼬부부’로 소문났다. 사고 당일도 자녀들에게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나간다”고 말했지만 알고 보니 부부끼리 외출 나와 공연을 보던 중이었다. 큰아들(19)은 사고가 난 17일 오전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은 뒤 오후 1시경 집에 돌아왔다. 마침 쉬는 날이었던 아버지가 집에 있었지만 아들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점심식사도 함께하지 못했다. 정 씨가 건넨 “잘 자”라는 짧은 인사가 부자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부부에게는 초등학생인 늦둥이 딸이 있다. 큰아들은 “이제 내가 가장”이라며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숨진 A 씨는 부인과 두 아들을 중국으로 보낸 뒤 홀로 살던 ‘기러기 아빠’였다. 한 엔지니어링 회사에 다니던 A 씨는 내년 초 가족과 함께 살 날을 고대하며 최근 새로운 전셋집을 얻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 가까스로 구조된 한모 씨(32·여)와 이모 씨(31·여)는 친구 사이다. 이날도 나란히 공연을 지켜보다가 사고를 당했다. 두 사람은 떨어지면서 간신히 난간 등을 붙잡아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경기도 성남시 합동대책본부에 따르면 16명의 사망자 가운데 30대 이상이 14명이다. 부상자 역시 11명 중 9명이 30대 이상이다. 대부분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다. 당초 부상자라고 주장했던 강모 씨(47)는 이번 사고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사상자는 대책본부 공식발표처럼 27명(사망 16명, 부상 11명)이다.

사고 다음 날인 18일에는 안전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책임감에 세상을 등진 한 가장의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졌다. 이날 오전 7시 15분경 성남시 분당구 테크노밸리 공공지원센터 건물 옆 길가에서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오모 과장(37)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추락사고가 난 ‘판교 테크노밸리 축제’의 안전관리 담당자였다.

오 과장은 이날 오전 2시부터 3시 20분경까지 분당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어 오전 4시경 사무실로 돌아온 뒤 6시 50분경 사무실에서 빠져나와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10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오 과장은 오전 7시 1분경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왔는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사고로 죽은 이들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진정성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유가족들은 경찰 조사에서 “평소 책임감이 강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사고 책임에 대한 무게감을 이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한 동료는 “사고 발생 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얼굴이 흙빛이었다.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고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오 과장이 죄책감에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며 “유가족 요청에 따라 부검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번 사고 희생자 가운데 처음으로 홍석범 씨(29)의 발인이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성남=박성진 psjin@donga.com·황성호 기자
#판교 공연장 참사#환풍구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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