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한국 고도성장의 비밀은 역사의 우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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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와 기적의 기원/차명수 지음/500쪽·2만2000원·해남

이 책은 정통 국사학계에 던진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지적 도발이다. 서문부터 노골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주장이 있다면 (우익, 좌익 같은 딱지를 붙이려 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통계와 현실감 있는 모델을 들고 나와 반박하면 된다.’ 감성적 민족주의 같은 것은 내버리고 오직 ‘팩트’로만 승부하자는 거다.

우선 인구변동과 산업현황 등을 담은 다양한 통계를 인용해 20세기 초반 식민지 조선의 경제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을 주장하고 있다. 18∼19세기 내내 양반과 평민을 막론하고 생활수준이 악화된 조선 말기와 비교하며 ‘후기 조선사회는 오늘날의 북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국사학계에서 성군으로 떠받드는 영·정조 시대가 포함된다.

저자는 붕당정치 붕괴 이후 조선왕조의 정치적 리더십이 땅에 떨어지고 소유권 보호와 계약 이행 등 기본적인 사회제도가 유지되지 못한 데서 경제 피폐의 원인을 찾고 있다. 반면 조선총독부가 식민 지배를 위해 구축한 제도나 자유주의 경제정책은 1960, 70년대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끈 요인이 됐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고도성장 원인을 자본 축적이나 높은 교육수준에서 찾는 기존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 발전이나 인적·물적 자본 축적이 빠르게 일어난 근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고도성장의 비밀은 산업혁명과 인구변천을 특별한 방식으로 결합시킨 역사의 우연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 역사의 우연에 식민지 시대가 포함된다.

그러나 저자는 식민 지배 때문에 경제성장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산업혁명과 인구 변천을 촉발한 계기는 식민시대 이전인 1876년 개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총독부가 경제성장에 필요한 공공재를 공급할 수 있었던 강력한 정권이었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남의 나라 침략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기아와 기적의 기원#식민지 근대화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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