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전철男-화장실女 ‘운명적 만남’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코멘트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장폴 디디에로랑 지음/양영란 옮김/1만3000원·232쪽·청미래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에 등장하는 프랑스 파리 센 강변 고서점. 주인공 길랭 비뇰은 책 파쇄기에서 두 다리를 잃은 동료 주세페를 위해 함께 고서점을 누비며 사고 당일 파쇄기에서 생산된 재생지로 만든 책을 찾아다닌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전우와 같은 진한 우정을 나눈다. 청미래 제공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에 등장하는 프랑스 파리 센 강변 고서점. 주인공 길랭 비뇰은 책 파쇄기에서 두 다리를 잃은 동료 주세페를 위해 함께 고서점을 누비며 사고 당일 파쇄기에서 생산된 재생지로 만든 책을 찾아다닌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전우와 같은 진한 우정을 나눈다. 청미래 제공
매일 아침 전철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와 공중 화장실에서 일기 쓰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

프랑스 파리에 사는 주인공 길랭 비뇰(36)은 책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책 파쇄기 책임기사로 하루 수 t의 책을 파쇄해야 한다. 그는 파쇄기를 ‘그놈’ ‘집단학살자’로 부르며 증오하지만 일자리를 잃은 순 없다. 파쇄기에서 살아남은 낱장을 오전 6시 27분 전철 안에서 낭독하며 책을 위로하고 자신의 삶을 견딘다.

비뇰은 우연히 전철 안에서 휴대용저장장치인 USB메모리를 줍는다. USB 속에는 쇼핑센터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쥘리(28)의 일기가 담겨 있다.

“나는 하루도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다.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마치 그날 하루를 살지 않는 것, 사람들이 나에게 강요하는 오줌-똥-토사물 청소 아줌마의 역할 속에 나 자신을 함몰시키는 것, 월급을 주며 떠맡긴 그 별 볼일 없는 기능만이 유일한 존재 이유인 시시한 여자임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158쪽)

일기를 읽고 사랑에 빠진 비뇰은 전철에서 낱장 대신 일기를 사람들에게 읽어주고, 일기 속 단서를 좇아 쥘리를 만나러 간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하트 뿅뿅.

차가운 도시남녀가 판치는 서울에서 엉뚱하고 순수한 매력을 가진 프랑스 남녀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니 따뜻한 온기가 돈다. 소설 속 공간인 전철, 화장실, 공장은 보통 무미건조한 장소로 여겨지지만 두 사람의 독특한 시각과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보니 소설적 상상력이 가득한 곳으로 바뀐다. 프랑스 영화 ‘아밀리에’ 속 오드리 토투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읽었다.

소설 속 조연들도 독특하다. 비뇰의 동료 주세페는 파쇄기 속에서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그날 파쇄기에서 생산된 재생지로 만든 책을 ‘피와 살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찾아다닌다. 공장 경비원 이봉은 늘 12음절 정형시로만 말하는 괴짜다. “소나기가 온다, 수상히, 갑자기/내 처소를 때려, 성마른 우박이.”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저자 장폴 디디에로랑은 한달간 무급 휴가를 내고 첫 장편소설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를 썼다. 청미래 제공
통신회사에서 일하는 저자 장폴 디디에로랑은 한달간 무급 휴가를 내고 첫 장편소설 ‘6시 27분 책 읽어주는 남자’를 썼다. 청미래 제공
이 소설은 저자의 첫 장편소설이자 국내에 번역된 첫 책이다. 15년째 단편소설만 써 온 저자는 2010년 헤밍웨이상을 수상했다.

그는 프랑스 보 지역에 살며 통신회사 오랑주에서 일한다. 한 달 무급휴가를 얻어 떠난 프랑스 남부 카마르그 바닷가에서 이야기의 절반을 완성했다고 한다.

소설은 프랑스에서 출간되기도 전에 25개국에서 출판 계약을 했다. 저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글을 쓰는 건 신이 되는 것이고 신이 된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고 말했다.

참, 전철에 탄 사람들은 큰소리로 책을 읽는 비뇰에게 욕을 했을까. 소설에선 ‘엄마 젖을 충분히 먹은 갓난아기들처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이 책을 읽는 당신 표정도 아마 그럴 것이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