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할머니의 보따리 안엔…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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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거리 헤매다 파출소에… “딸이 아기 낳고 병원에” 울기만
경찰 수소문 끝 입원 딸 찾아줘… 딸 보자마자 “어여 무라, 어여…”
짐 풀자 미역국, 흰밥, 이불…

A 씨가 출산한 딸에게 주려고 미역국과 나물 반찬, 흰밥, 이불 등을 싼 보따리.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A 씨가 출산한 딸에게 주려고 미역국과 나물 반찬, 흰밥, 이불 등을 싼 보따리. 부산지방경찰청 제공
15일 오후 8시 부산 부산진구의 한 종합병원. 치매를 앓고 있는 A 씨(68)는 출산한 딸(40) 앞에서 가슴에 소중히 품고 있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다 식어버린 미역국과 찬밥, 나물 반찬, 생수 한 병, 그리고 두툼한 이불…. A 씨는 딸에게 “어여 무라(어서 먹어라)”를 연발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낳은 딸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모정(母情)’이었다.

“엄마, 왜?” 딸은 엄마의 그런 행동이 처음에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옆에 있던 경찰이 엄마의 ‘갑작스러운 외출’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자 그제야 딸은 알았다. 엄마가 딸에게 산후 조리용 먹을거리를 전하기 위해 6시간이 넘게 길거리를 헤맸다는 사실을…. 딸은 엄마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모성애’는 ‘치매’보다 강했다.

앞선 이날 오후 2시경 부산 서구 아미파출소로 “할머니 한 분이 보따리 두 개를 든 채 한 시간째 동네를 서성이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근무자들이 현장에 출동해 보니 A 씨가 한 병원 앞에서 거의 탈진한 상태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보따리를 끌어안은 채 “딸이 아기를 낳고 병원에 있다”는 말을 반복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과 딸이 있는 병원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게 약 2시간이 지난 뒤 A 씨는 어렵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경찰은 주민센터를 통해 할머니의 신원과 주소지를 알아냈고 동네 이웃에게 수소문한 끝에 오후 8시경 딸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기억을 흐리게 만드는 치매도 자식을 챙기는 모정을 꺾진 못했다.

경찰은 할머니의 ‘작은 기억’이라도 되살리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나이가 든 어르신인 만큼 먼 거리에서 온 건 아닐 거라는 생각에 어디에 살고 있는지부터 물었다. 그러던 중 A 씨가 말했다. “담배를 태우고 싶어요.” 경찰이 제공한 담배를 피우던 A 씨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렇게 A 씨가 자신과 딸의 인적사항을 떠올리기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미파출소 김치환 경위는 “요즘 같은 삭막한 시대에 ‘피는 물보다 진한’ 모습을 보며 가슴 뭉클했다”고 말했다.

부산지방경찰청은 이 사연을 17일 ‘치매를 앓는 엄마가 놓지 않았던 기억 하나’라는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올렸다. 누리꾼들은 “정말 뭉클하네요” “감동이다” “모성애는 무엇보다 강하네요” “폭풍 좋아요”라는 내용의 훈훈한 댓글을 달았다. 이 글은 페이스북에서 노출 건수만 40만 건, ‘좋아요’를 클릭한 건 2만 건이 넘었다.

한편 경찰은 치매 노인과 관련해 ‘사전 지문등록’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부산=조용휘 기자 silent@donga.com
#모성애#치매#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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