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세상을 진지하게만 대하면 다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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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밀란 쿤데라 지음·방미경 옮김/152쪽·1만3000원·민음사
밀란 쿤데라, 14년만의 신작장편… 4명의 친구를 둘러싼 45개 이야기

밀란 쿤데라는 14년 만에 펴낸 장편을 통해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인생에 대한 통찰은 깊다. 민음사 제공
밀란 쿤데라는 14년 만에 펴낸 장편을 통해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문장은 간결하고, 인생에 대한 통찰은 깊다. 민음사 제공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의미한 행동을 흔히 ‘잉여짓’이라고 한다. 생의 의미를 좇아 내달리는 이들에겐 한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향수’ 이후 14년 만에 신작 장편을 선보인 밀란 쿤데라(85)는 인간의 삶은 의미 없음과 보잘것없음의 축제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존재의 가벼움’을 드러낸다.

이번 소설은 헐겁게 배열된 퍼즐과 비슷하다. 짧은 에피소드를 담은 단막극처럼 4명의 친구 알랭, 라몽, 샤를, 칼리방을 둘러싼 마흔 다섯 개의 이야기가 잇달아 펼쳐진다. 장편소설로도 길지 않은 분량인데, 그 안에서 각 장은 평균 3쪽 분량으로 촘촘히 나눠진다.

6월 프랑스 파리 거리를 거닐던 알랭은 배꼽이 드러난 옷을 입은 여자들과 마주친다. 오늘날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은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배꼽에 집중돼 있다고 느낀다. 몸 한가운데 동그랗게 파인, 의미 없는 구멍에 말이다.

라몽의 전 직장동료 다르델로는 암에 걸렸을까봐 걱정하지만 의사에게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안도한다. 하지만 다르델로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라몽에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하고는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경험한다. 다르델로는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기교를 갖춘 인물이다. 반면 카를리크는 평범하고 흥미롭지 않은 남자다. 파티에 참석한 아름다운 여자는 다르델로가 아니라 카를리크를 선택한다. 탁월함은 상대방도 뛰어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보잘것없다는 건 주변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함께 모여 스탈린과 칼리닌의 일화를 이야기한다. 스탈린의 농담을 역겨운 거짓말로 여기는 동지들 사이에서, 스탈린은 유일하게 칼리닌에게 정을 준다. 칼리닌은 전립샘 비대증 환자여서 연설 도중에도 수시로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한다. 스탈린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부러 천천히 연설을 하고, 칼리닌이 자리를 뜰 수 없어 괴로워하다 결국은 바지에 실례하고 마는 상황을 즐긴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디고, 소변과 맞서 투쟁하는 인간적인 행위,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격찬하는 것이다.

쿤데라는 사소하고 시시한 것에조차 의미를 부여하려는 우리 시대의 무거움을 응시한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밀란 쿤데라#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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