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91>신경의 통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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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통로
―채호기(1957∼)

산에 있다.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
녹색의 잎들 사이로 신경이 엿보이는.
그 신경을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고, 잎이 손바닥을 뒤집고
나무의 머리칼인 푸른 살덩이가 송두리째
휘어지고 뒤집히며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눈앞에 비의 블라인드가 쳐지고 눈은 갇힌다.
비는 물방울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
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다.
물줄기가 된다. 신경의 통로
물속에, 격렬한 역류 속에,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
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된다.
비가 온몸에 부닥친다. 심장충격기가 피를
가격하듯 대지의, 하늘의 신경이 맨살을
파고든다. 땀도 아니고 비도 아닌
언어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끈적끈적하고
무색의 번쩍이는 언어에 신경이 파고든다.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뱀장어처럼
번개가 언어에 접속되고 신경 덩어리가
되는 언어들. 흙, 돌, 풀잎, 수피, 잎,
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다. 몸은
산에 있다.


화자는 산에 있다. 바위 능선이 아니라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가 울창한 숲 속이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불더니 나무들이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가면은 의도를 암시하는 얼굴, 과장된 표정의 무서운 얼굴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물기둥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되는 ‘신경의 통로’란다. 호된 충격을 느낄 정도로 거세게 몸을 때리는 비! ‘하늘의 신경이’ 화자의 맨살을 파고든단다. 찌릿찌릿 전기를 방출하며 천둥이 울고 번개가 날아다니나 보다. 코를 찌르는 비리고 매캐한 냄새 속에서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화자의 몸에서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흙, 돌, 풀잎, 수피, 잎/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단다. 독자의 몸도 그 산에 있는 듯하다. 산속의 폭우를 강렬한 언어로 생생히 그렸다. 깊은 산에서 폭우를 만나면 무섭기도 하지만 장쾌하기도 할 테다. 산행에는 비옷을 챙기세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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