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용주]‘이바구길’이 만든 노인 일자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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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주 한국노인인력개발원장
박용주 한국노인인력개발원장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중략).’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의 일부다. 부산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복도로의 한 옥상 마당에는 ‘유치환 우체통’이 있는데 초량에서 교직생활을 해서 부산과 인연이 깊은 청마 선생을 기억하는 장소다. 생전에 편지를 즐겨 썼던 선생의 영향일까. 뙤약볕에도 꾹꾹 눌러 쓴 손 편지를 빨간 우체통에 넣는 이들이 눈에 많이 띈다.

‘초량 이바구길’은 부산역 맞은편 골목에서 시작된다.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복도로를 오르다 보면 ‘유치환 우체통’처럼 사연을 간직한 명소가 곳곳에 숨어 있다.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쓴 김민부 시인을 기념하는 ‘김민부 전망대’,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고 장기려 박사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협동조합’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광복 이후 역사와 주민들의 생활상을 수집해 담아낸 생활자료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바구 공작소’도 볼거리다.

일제강점기 노동자들의 거주지였고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판자촌이 몰려있던 곳. 부산에서 가장 낙후된 이 지역이 ‘이바구길’이 열리면서 부산의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입소문을 타고 하루 1000여 명이 방문할 정도로 인기라고 한다. 현대적인 재개발이 아닌 기존 마을에 역사와 문화를 덧입혀 도시의 정체성을 살리는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이다.

주목할 것은 지역사회 자원을 활용하면서 노인 일자리를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이바구길 탐방객 스스로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장소라는 뜻의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 충전소’와 지역의 역사성을 살린 ‘6·25 막걸리집’ ‘168도시락·국집’ 등은 현지 노인들의 참여로 운영되고 있다. 가격도 착하고 맛도 좋아 부산 출장을 가는 우리 개발원 직원들은 이미 단골이 됐다. 사람 냄새 폴폴 나는 정겨운 동네에서 외할머니의 환대를 받는 기분이랄까.

부산 동구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부산시 전체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다. 부산시 평균은 12.5%이지만 동구는 18%가 넘는다. 이르면 3, 4년 내 초고령 지역에 도달할 것이란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빈곤 노인 인구 비율도 높아 노인 생활 안정을 위한 대안이 시급한 상황에서 지역 노인이 주체가 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해 현안을 해결하려는 접근은 획기적이다.

경제적 효과도 입증됐다. 부산 동구청이 분석한 결과 지난해 3월 이바구길 개통 이후 1년간 지역 어르신 등 200여 명이 일자리를 새로 얻었고 경제적 파급 효과는 20억 원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노인이 도시재생의 중심축을 담당하면서 지역경제도 살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무엇보다 산동네에 스토리를 덧입혀 관광 콘텐츠와 진화된 노인 일자리 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현 정부가 추구하는 창조경제와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휴가 때 산복도로 할매들의 이바구를 들으며 과거의 유치환과 장기려를 만나러 가는 건 어떨까.

박용주 한국노인인력개발원장
#노인 일자리#부산#초량 이바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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