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흘리는 광부의 모습은 우리들의 장한 아버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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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 다큐 사진전 여는 박병문씨

23일 서울 경인미술관 ‘아버지는 광부였다’ 사진전에서 만난 박병문 작가(오른쪽)와 아버지 박원식 씨가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박 작가는 뒤에 걸린 광부의 사진을 두고 ‘그의 이름 광부였다. 아, 나의 아버지!’ 라고 사진집에 썼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23일 서울 경인미술관 ‘아버지는 광부였다’ 사진전에서 만난 박병문 작가(오른쪽)와 아버지 박원식 씨가 손을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박 작가는 뒤에 걸린 광부의 사진을 두고 ‘그의 이름 광부였다. 아, 나의 아버지!’ 라고 사진집에 썼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광부의 아들은 카메라를 들고 지하 1000m 갱으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막장 안은 뿌연 분진이 흩날렸고 40도가 넘는 기온 탓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사진을 찍기에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이곳에서 일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 아버지가 생각나 아들은 사진을 허투루 찍을 수 없었다.

강원 태백 출신 박병문 씨(55)가 탄광 다큐멘터리 사진집 ‘아버지는 광부였다’(하얀나무)를 출간하고 29일까지 서울 경인미술관에서 전시를 연다. 그는 탄광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지난해 ‘제1회 최민식 사진상 특별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가 찍은 흑백사진에는 분진과 사투를 벌이며 굴진 작업을 하고, 탄벽을 다이너마이트로 터뜨리고, 바가지로 탄을 담는 광부들의 모습이 담겼다.

아버지 박원식 씨(84)는 1956년 태백 장성광업소에 입사해 20여 년간 탄광에서 일했다. 아들은 탄광으로 일하러 가는 아버지의 듬직한 등을 보며 컸다. 아버지가 탄광 사고를 겪은 후 가족들은 동해시로 이사했다. 아들은 1990년 고향에 일자리를 얻어 다시 돌아왔다. 그의 눈에 소수지만 여전히 탄광을 지키는 광부가 들어왔다. 23일 사진전 개막식에서 만난 그는 “광부를 보는 순간 운명처럼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광부는 아버지의 분신이기도 했다.

“어릴 적 새까만 얼굴로 집에 돌아온 아버지 손을 잡고 공동목욕탕에 갔어요. 당시 가족들은 갱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금지돼 있어 아버지가 어떻게 일하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요즘 아버지의 존재감이 갈수록 희미해지는데 힘겹게 땀 흘리며 일하는 광부의 모습을 통해 장한 아버지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탄광 내부를 사진으로 남기는 일은 힘들었다. 그는 “탄광 안은 어두컴컴했다. 카메라 플래시 없이 내부 조명에 의지해 사진을 찍어야 했다. 수십만 장을 찍으면 한두 장 건질 수 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길 꺼리는 광부들을 설득하는 데도 오래 걸렸다.

사진전 개막날 아버지는 고운 한복을 차려 입고 서울로 왔다. 아버지는 “장한 아들 고맙다. 우리 광부의 삶을 사진으로 남겨 도시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대견하다”고 칭찬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일한 탄광의 구석구석을 기록으로 남겨 선물로 드리고 싶었다”고 답했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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