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대통령 눈과 귀 막는 참모부터 해임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0일 0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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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연평도 도발때 초기대응 잘못
“청와대 ×자식들 청소하라” 중진의원 공개비판 나왔다
대통령의 실종자가족 방문 ‘심기 경호’ 위해 막으려 했나
민심 아닌 보고서만 전달받다간 대통령도, 국민도 속을 수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지금쯤 대통령도 알았을 것이다.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잘 짜여진 보고서만 읽으면서 자신이 속고 살았다는 것을.

2014년 4월 16일 너무나 착하고 어른보다도 성숙했던 우리 아이들이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 뜬눈으로 밤새웠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 날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러 가려 할 때 이를 막아선 건 청와대 참모진이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경호상 문제가 있다고 참모들이 만류했지만 대통령은 ‘가기로 한 것이 아니냐’며 강행했다”고 전했다.

어쩌면 대변인은 그토록 국민을 생각하는 대통령의 애민(愛民)정신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탔을지 모른다. 덕분에 국민은 그토록 충성스럽게 대통령 안위를 챙겨온 참모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 왔는지도 능히 짐작하게 됐다.

그날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에 가지 않았다면, 심기 경호에 능통한 참모들이 시키는 대로 그냥 악수만 하고 나왔다면 대통령은 지금껏 속고 있을 공산이 크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이 “어떤 여건에서도 잠수부 500여 명을 투입하고…”라고 진지하게 보고하면 대통령은 진짜 구조작업을 잘하는 줄 알았을 터다. “거짓말!” “우리가 속아도 너무 속았다” “이게 국가냐!” 같은 고성과 원망과 욕설이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A4용지 한 장의 보고서에 들어 있을 리 없다.

야유가 계속되자 김기춘 비서실장은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려고 했다. 아마도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했을 것 같다. 어쩐 일인지 대통령은 손짓으로 비서실장을 밀어냈다. 그리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여기 있는 분들 다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고 비로소 체육관엔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이 참모진에 속았다고 보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공직자들이 제 할일을 다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대통령이 ‘안전행정’을 강조했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설령 대통령이 구름 위에 산다고 해도 엄마들이 “우리 아이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고, “마지막까지 (구조에) 최선을 다해 달라는 것이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말이 나와야만 공직사회가 움직이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대통령도 충격 받았어야 정상인 거다.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선거와 사법제도가 없는 고대 중국에서 나쁜 관리를 만났을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황제에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했다. 법치주의가 없고 책임정부가 아닌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중앙정부의 자비심에 호소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재난대응 시스템만 후진적인 게 아니라 여왕이 지배하는 봉건국가로 돌아간 형국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 굳건한 카리스마 덕분이면 차라리 좋겠다. 대통령은 작년 8월 김 실장을 임명하면서 ‘비서실이 국정운영의 중추’라고 선언한 바 있다. 월요일에 대수비(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 화요일에 국무회의를 열어 비서실이 내각 위에 올라앉았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 7일 대통령이 재난별 위기관리 매뉴얼의 정비를 주문한 곳도 국무회의 아닌 대수비였다.

그렇다면, 세월호 침몰 이후의 우왕좌왕은 비서실이 국정운영을 잘못했다는 얘기다. 첫 보고는 제대로 올라왔는데 심기 경호를 위해 지체됐거나 낙관적으로 왜곡돼 대통령 메시지가 잘못 나갔다면 더 위험하다. 그러고도 대통령이 현장에 가는 것까지 막고 나설 정도면 참모진은 간신을 넘어 역신(逆臣)이라고 해야 할 판이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도발 당시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은 청와대의 미숙한 초기 대응에 “대통령을 오도한 청와대 ×자식들 다 청소하라”고 공개 비판했다. 작년 말만 해도 “대통령만 모시는 건 잘하는 게 아니다. 내각과 의견 조율 잘하는 것도 대통령을 잘 모시는 일”이라고 지적하는 의원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도 없다. 모두들 청와대가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해마다 4월 16일을 죄스럽게 기억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제대로 재난대응 시스템을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 단 여전히 비서실이 중추가 될지, 새롭게 책임정부에 맡길지는 따져봐야 할 일이다.

막강 비서실을 그냥 둔 채 지방선거 이후 관련부처 장관들을 경질하는 식으로는 봉건적 체제 못 고친다. 국가보다 주군을 향한 충성심에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려온 참모진부터 내보내야 한다. 대통령 지지도가 암만 높아도 법과 제도 아닌 대통령의 명령과 분신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가 선진국 되는 건 불가능하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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