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견훤 왕궁터 과연 어디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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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미해결 난제… 동고산성-중앙동 일대-인봉리 놓고 학설 분분

견훤(867∼936)이 892년 세운 후백제는 역사가 짧은 왕조였다. 한때 신라 경주를 점령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결국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936년 멸망할 때까지 45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수도였던 전주가 도성으로 기능한 기간도 37년뿐이다. 이러니 관련 사료나 유물이 거의 남지 않은 게 어쩜 당연해 보인다.

특히 견훤의 왕궁이 전주 어디쯤 있었는가는 지금까지 학계의 콜드 케이스(cold case·미해결 난제)로 남아 있다. 최근 국립전주박물관이 개최한 학술세미나 ‘후백제 유적의 정비 방안’은 이 콜드 케이스를 풀려는 시도였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견훤 왕궁 터는 현 전주시청 동쪽인 물왕멀 일대로 추정해왔다. 1940년대 일본이 이 지역 역사를 정리한 ‘전주부사(全州府史)’엔 당시 건축자재로 추정되는 막새나 석물을 수집했다고 기록돼 있다. 학자들은 이를 후백제 왕궁의 유구(옛 건축물 흔적)라 봤다. 하지만 후백제 시기 세웠다고 다 왕궁은 아니며, 이 일대가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왕실 권위에 적합지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1980, 90년대에는 고 전영래(全榮來) 원광대 교수가 주창한 ‘동고산성설’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당시 전주시 완산구에 있는 산성 발굴조사를 이끌었던 전 교수가 1980년 ‘전주성(全州城)’이라 새겨진 연꽃무늬 막새를 찾았는데, 이것이 후백제 유물로 밝혀지며 단박에 급부상했다. 1990∼92년에는 산성 중심부에서 길이 84.2m, 폭 14.1m의 초대형 건물 터까지 드러났다. 게다가 숙종 14년(1688년) 성황사(城隍祠)란 절을 옮기며 쓴 ‘성황사중창기’에 “이곳이 세간에서 말하는 견훤의 옛 궁성지”란 대목도 나와 더욱 힘이 실렸다.

근래엔 동고산성을 주 왕궁보단 피난성(避難城)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실제로 왕궁으로 보기엔 산성이 너무 바위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게다가 겨울철을 보낼 온돌이나 음식을 해먹을 부뚜막 터가 없고, 일상생활용 유물도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진정환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견훤 왕조가 평상시엔 평지 왕궁에 머물다 위급할 때 동고산성으로 이동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21세기 들어선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있던 완산구 중앙동 일대를 왕궁 터로 보는 견해가 주목을 받았다. 2006∼2007년 전라감영 복원사업이 벌어졌는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와 담장, 배수시설이 발견됐다. 또 인근에선 통일신라시대 관청건물용 기와도 출토됐다. 김주성 전주교육대 교수는 “1912년 지적도를 보면 통일신라 9주5소경(九州五小京)의 격자형 도시구획이 그대로 이어진 흔적이 보인다”며 “견훤 왕궁이 통일신라기 도시구획에서 그대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장 최근엔 곽장근 군산대 사학과 교수의 ‘완산구 중노송동 인봉리’설이 주목받고 있다. 곽 교수가 지난해 11월 한국고대사학회 학술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의견이다. 현장조사결과, 이 일대에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이 확인됐다. 또 인봉리는 산자락에 감싸 안겨 서쪽으로 트여 있는 형국인데, 불교에서 서방에 있다는 미륵정토를 꿈꾼 견훤이 왕궁을 서쪽을 향하도록 세웠다는 구전과 부합한다. 곽 교수는 “이곳 저수지인 인당지의 일부 제방은 후백제가 망한 뒤 궁성 서쪽 성벽을 이용해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주국립박물관과 전주시는 조만간 이 일대를 발굴해 견훤 왕궁 터 가능성을 조사할 계획이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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