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뒤 한국을 빛낼 100인’ 5년째 선정… 그들을 만든 ‘물건’은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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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
‘광고천재’ 이제석에게 빨간 목장갑이란? 자만할때마다 초심 일깨우는 ‘마술장갑’

'광고천재'라는 찬사는 독이었다. 일감이 몰아닥쳤다. 넓은 사무실에 앉아 결재만 하며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한 번씩 움직일 땐 꼭 직원들을 대동했다. 작업 현장에는 직접 나가지 않고 직원들을 대신 보냈다. '원격조종'으로 탄생한 광고에는 '눈깔'이 없었다. 광고주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웠다.

이럴 때 이제석광고연구소 대표 이제석 씨(32)에게 한동안 잊고 지낸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 물건이 있었다.

"서랍에 처박아뒀던 목장갑을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됐어요. 순간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 아입니까. 그래, 난 시장통 국밥집 간판쟁이 출신 아이가…."

이 씨는 대학 졸업 후 시장에서 상점 간판을 만들면서 광고의 기초를 닦았다. 목장갑은 거친 목재를 나르고 철판에 못질하던 그의 필수품이었다. 고비 때마다 오기가 발동하는 뚝심이 그때 길러졌다. 미국 뉴욕 '원쇼 페스티벌' 최우수상과 광고계의 오스카상인 '클리오 어워드' 동상 등 세계 유수의 광고제를 휩쓴 그에게 목장갑은 초심(初心)의 상징이었다.

이 씨는 지난해 방 두 칸짜리 작은 사무실로 옮겼다. 광고물 설치작업을 할 땐 가장 먼저 현장에 간다. 벙거지 모자에 목엔 수건을 두르고 손바닥 부분이 시뻘건 목장갑을 낀, 여느 공사판 인부의 모습으로. 그는 "마이클 잭슨이 다이아몬드 장갑이라면 저는 목장갑이죠"라고 했다.

소유한 사람의 인생 역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건이 있다. 쓸모는 사소해도 삶의 지혜를 일깨워 주거나,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지키게 해준 물건들 말이다. 동아일보는 창간 94주년 기획으로 올해도 '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을 선정했다. 나름의 성취를 이룬 100인에게도 서툴고 막막했던 과거가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삶의 궤적이 엿보이는 '100인의 물건'을 골라 봤다.

● 초심을 일깨우는 것들


김형태 변호사와 50년을 함께한 필통.
김형태 변호사와 50년을 함께한 필통.
1981년 사법시험을 치르던 날, 김형태 변호사(58·법무법인 덕수)는 시험장 책상에 낡은 고동색 필통을 꺼내 놨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뒤 20년 가까이 써 오던 것이었다. 필통 안엔 어머니가 손수 깎아준 연필 3자루가 있었다. 크든 작든 시험 전날이면 아들의 연필을 깎아주는 게 어머니의 오랜 응원 방식이었다. 아들은 그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김 변호사는 지난달 31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기자에게 반세기 동안 간직해 온 플라스틱 필통을 건네 보였다. 필통을 쥔 그의 검지와 중지 첫 마디는 굳은살이 박여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글씨 쓰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어요. 손이 움직여야 머리에 영감이 와요. 사적인 글이나 기고문은 물론이고 재판 관련 서면도 다 손으로 씁니다."
김 변호사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열정을 불어넣어 준 게 이 필통이라서 지금껏 쓰고 있다"고 했다. 변호사 일을 할 때도 글쓰기 습관 덕을 많이 봤다. "재판이라는 게 사실을 정확히 규정한 뒤 상대를 설득하는 일이기 때문에 언어적 표현력은 좋은 무기입니다. 필통이 총보다 강한 거죠."

'행복한 죽음' 전문가로 호스피스 치료의 대가인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암예방관리 전공)는 어릴 때 큰누나를 위암으로 떠나보냈다. 동생들 공부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챙기지 못했던 누나였다. 어머니가 "누나 수술 받으러 서울 갔다"고 얼버무리던 날, 스물세 살의 큰누나는 비석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떴다.

윤 교수는 얼마 뒤 집 정리를 하다 초등학생 때 작은누나 소풍에 따라갔다가 누군가의 묘지 비석 옆에서 찍은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작은누나와 함께 찍은 그 사진 한 장이 저에겐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사람의 죽음을 평생 탐구하게 될 것 같은…." 윤 교수는 모서리가 너덜너덜한 이 사진을 40년째 간직하고 있다.

최홍 맥쿼리투신 대표와 결혼 승낙 징표인 카디건.
최홍 맥쿼리투신 대표와 결혼 승낙 징표인 카디건.
과거의 아픈 상처와 얽혀 있지만 이후 삶의 자양분이 된 물건도 많았다. 최홍 맥쿼리투자신탁운용 대표(53)의 사무실에 365일 걸려 있는 자주색 카디건이 그런 물건이다. 30년 전 부산에서 만난 예비 장모는 그에게 옷이 담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스물세 살 청년은 장모 앞에서 상자를 열어 보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제도 없이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지독히 가난했던 사윗감을 처가에선 강하게 반대했다. 몇 차례 결별 위기가 있었지만 인연은 끝내 이어졌다. 장모는 어렵게 결혼을 승낙하며 그에게 분홍 카디건을 선물했다. 이 옷은 그가 처가에, 그리고 세상에 뜨겁게 받아들여진 첫 순간의 징표로 남았다.

최 대표는 "고아처럼 자란 제가 사실상 '부모님'께 받은 첫 선물이고, 힘들 때마다 희망을 보게 해준 준 옷이라 실밥이 다 터져도 못 버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의식'처럼 이 카디건을 입는다.

백원필 원자력硏 본부장과 가난의 기억 ‘수학의 정석’.
백원필 원자력硏 본부장과 가난의 기억 ‘수학의 정석’.
백원필 한국원자력연구원 원전안전연구본부장(53)은 지난달 30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참고서 '수학의 정석' 얘기를 하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 돌려 달라고 할지 몰라 허겁지겁 넘겨봤는데…."

백 본부장은 고교 1학년 때 수학의 정석을 선배들에게 잠깐씩 빌려 봤다. 줄도 못 긋고 중요한 공식을 노트에 빽빽이 옮겨 적던 기억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중학교 때 반장을 하면서도 돈이 없어 수학여행에 못 갈 정도로 가난했다. 홀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며 백 본부장 형제를 키웠다.

"농사를 돕고 산에서 나무를 하며 틈틈이 공부를 했어요. 책 사는데 돈을 쓰면 큰일 나는 줄 알았죠(웃음)."

그는 "아련하게 마음이 아파 오는 시절이지만 좌절하지 않고 극복했다는 것이 지금 자신감의 원천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저랑 길게 통화할 수 있으세요?"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44)는 중학교 2학년이던 1980년대 중반, 114 안내원에게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는 집에 있던 다이얼 전화기를 붙들고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곳이 어딘지 알려 달라"고 사정했다.

"안내원이 처음엔 황당해하더니 제 진심이 느껴졌는지 대한무도협회 번호를 알려줬어요."

이 통화를 계기로 양 대표는 또래 댄서들을 알게 돼 본격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6년 뒤에는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했다. 114 통화를 했던 다이얼 전화기가 그에겐 잊지 못할 물건이다.

강영진 성균관대 갈등해결연구센터장(53·국정관리대학원 겸임교수)은 10년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늦깎이 유학을 떠난 지 6개월에 IMF 외환위기를 만났다. 처자식까지 데리고 미국에 왔는데 환율이 두 배로 뛰면서 공부를 관둬야 할 처지에 놓였다. 당시 점심으로 먹던 1달러짜리 쿠키를 강 교수는 내 마음 속의 물건으로 꼽았다.

● 성공 자축하는 나만의 기념품

2010년 밴쿠버에 이어 올해 소치 겨울올림픽까지 제패한 이상화 선수(25·스피드스케이팅)는 밴쿠버 대회에서 딴 첫 금메달이 보물 1호다. 단지 노력의 결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밴쿠버(대회) 때까지는 금메달이 유일한 목표였는데 메달을 따고 나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어요. 나를 위해 희생해준 주위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죠."
메달이 준 높은 명예보다 이를 통해 얻게 된 넓은 시야에 이 선수는 더 감사했다.

'7년의 밤'과 '28' 등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정유정(48) 작가는 소설을 한 권 쓸 때 스케치북 6, 7권 분량의 그림을 그린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장소를 한 곳 한 곳 손으로 세세하게 묘사한다. 그는 상상하는 세계를 이미지로 완벽하게 구현한 뒤 글로 옮긴다. '7년의 밤'에 나오는 세령마을도 그렇게 탄생했다.

정 작가는 "출간된 소설 못지않게 모태가 된 스케치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했다. 간호사로 일하다 마흔 넘어 데뷔한 그에게 스케치북은 긴 무명시절 스스로를 단련시킨 도구였던 동시에 지금은 성공을 자축하는 자신만의 기념품이다.

< 특별취재팀 >

▽팀장 문권모 소비자경제부 차장

▽팀원 유덕영(국제부) 황인찬 신광영 손효주(사회부) 우경임(인력개발팀) 권기범(소비자경제부) 김호경(산업부) 박성진 홍정수(수습기자)

▽대학생 인턴기자


고혜린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4)
맹서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24)
이혜림 성균관대 컴퓨터교육과 졸업(26)
장영근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졸업(28)
최현정 연세대 문헌정보학과 졸업(25)
#한국을 빛낼 100인#이제석#김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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