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미국 과학공학 명예의 전당 오른 이성규 교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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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과학 강국 된 이유는 기업이 대학 연구소 찾아
“이런 기술 만들어 달라” 할만큼 産學벽 없기 때문

책으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성규 교수. 인생의 정점에서 청각장애라는 청천벽력 같은 장애를 만난 그는 연구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미국 과학인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오하이오대 제공
책으로 가득한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이성규 교수. 인생의 정점에서 청각장애라는 청천벽력 같은 장애를 만난 그는 연구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미국 과학인에게 주는 최고의 영예를 안았다. 오하이오대 제공
《 “KB요? ‘Korean Bozo(한국 멍청이)’의 약자입니다. ‘나 같은 멍청이도 이렇게 성공했는데 다른 한국인들은 얼마나 큰일을 해내겠느냐’는 뜻입니다. 하하하.” 지난달 미국 실용과학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과학공학 명예의 전당(ESHF)에 오른 이성규 오하이오대 석좌교수(61)는 자신의 애칭 ‘KB’의 뜻을 묻자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이성규라는 이름보다 ‘KB’로 통한다. 명함에도 성과 이름 사이에 KB라고 적혀 있다. 다시 그의 말이다. “원래 KB는 ‘Korea's Best’, 즉 한국의 최고라는 뜻이었습니다. 유학 오기 전 한국 친구들이 미국 가서 공부 잘하라며 지어 준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당돌한 별명이었죠. 어떻든, 그 녀석들이 지어 준 별명을 여태 달고 살았으니 의리를 지킨 셈이죠.” 이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대체에너지 셰일가스 개발의 권위자로 통한다. 요즘 미국에는 셰일가스를 파내느라 도시 전체가 건설 현장처럼 변한 곳이 많다. 풍부한 매장량과 저렴한 가격의 셰일가스는 세계 경제를 회복시킬 만큼 장래성이 높은 차세대 에너지원으로 부상했다. 》

이 교수는 아무도 셰일가스의 장래성에 관심을 두지 않던 30여 년 전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추출법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땅속 바위틈에 퇴적돼 뽑아 올리기 힘든 셰일가스를 추출하는 데 물 대신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그의 발명 덕분에 세계 셰일가스 생산은 60% 증가하고 생산 비용은 4분의 1로 줄었다. 많은 에너지업체가 그가 개발한 추출법을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 에너지기업 셰브론은 회사 웹사이트에 ‘이성규 박사에게 감사한다’는 문구를 싣고 경의를 표할 정도다.

미국 셰일가스 개발 권위자

이 교수는 이런 공로 등을 인정받아 올해 미국 과학공학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됐다. 명예의 전당에는 세계 최고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 반도체를 창안한 잭 킬비 등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 회원에 올라 있다. 올해 그와 함께 입성한 회원도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기를 발명한 마틴 쿠퍼 박사 등 쟁쟁한 인물들이다.

회원이 되면 명예의 전당에 초상화가 걸리고 미국 교과서에 연구 업적이 소개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 교수는 지난달 14일 전당 입회식에서 “이제 연구를 그만두고 쉬려고 했는데 다른 회원들의 업적을 따라가려면 은퇴 계획을 늦춰야 할 것 같다”는 유머러스한 소감을 남겼다.

어느날 깨어보니 아무소리 안들려

이 교수는 1977년 미국에 건너와 34세의 젊은 나이에 애크런대 석좌교수에 올랐고 1997년 미주리대를 거쳐 2010년 오하이오대로 스카우트돼 ‘지속 가능 에너지 및 신소재 연구소(SEAM)’를 이끌고 있다. 미국 특허 34건, 국제 특허 87건을 보유하고 있으며 화공학도의 필독서인 화공학백과(ECP)를 저술했다.

수월하게 성공 가도를 달려온 듯하지만 연구생활 초기에는 고생의 연속이었다. 한국 토종 과학자로 20대 중반에 미국에 건너온 그에게 선뜻 연구 지원금을 내주는 기업은 없었다.

“교수 임용 초기에 12번 연속 연구과제 제안서를 거절당했습니다. 13번째 미국전력연구소(EPRI)에 제출한 과제로 처음 연구비를 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나도 이제 미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400∼450건의 연구과제 제안서를 제출했다. 그중 지원금을 받은 과제는 116건이니 300건 이상이 퇴짜를 맞은 셈이다. 세계적인 과학자인 그도 연구과제 4건당 3건이 낙방한 셈이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이룬 그의 성공이 더욱 의미가 깊은 것은 그가 성공의 정점에서 갑작스레 찾아온 장애(청각)를 이겨 낸 것.

“어느 날 일어나 보니 세상이 조용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

2007년이었다. 55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잘 들리던 귀가 멀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적막의 세계에서 살려니 충격은 엄청났다. 더구나 연구가 전성기였을 때 닥친 일이었기에 더 힘들었다. 기계 작동음을 듣거나 동료와 연구 결과를 상의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물론 물건을 사고 음식을 주문하는 등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의사들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좀 흘러 제가 좀 마음의 여유를 찾을 때쯤 친구들이 ‘머리를 너무 많이 돌려 귀가 고장 난 것’이라고 농담하며 위로하더군요.”

그는 한동안 많이 방황했다. 그동안 너무 승승장구해 하늘이 내린 ‘벌’인가 하는 자책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다. 한쪽 귀에 인공 와우 이식술을 받고 어느 정도 청력도 회복했다. 결국 그를 다시 연구실로 부른 것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었다.

“연구를 하다 보면 수많은 실패를 겪습니다. 실패를 겪을 때 언제나 ‘나는 이 좌절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다짐했습니다. 청각장애도 뛰어넘을 수 있는 좌절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지요.”

미국 사회가 갖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그가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됐다. 미국인들은 동정이 아닌 이해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곳곳에서 뻗어주었다.

“인공 와우 이식을 받았다 해도 작은 소리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의 질문이 안 들려 난감한 때가 많았지요. 그러면 학생들이 서로 도와 가며 뒷자리 질문 내용을 앞자리까지 릴레이식으로 전달해 줍니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교대로 찾아와 전화도 받아 주고요. 제가 잘 들을 수 없어서 전화 회의를 할 수 없을 때는 학교 측에서 중간 전달을 담당할 사람을 금방 보내 줍니다.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미국에서는 장애인을 돕는 것이 생활화돼 있기 때문이죠.”

이번 인터뷰도 전화가 아닌 e메일을 10여 차례 주고받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교수는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이번 명예의 전당 입성이 청각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 화공학계에서 순수 연구보다 산업 활용도가 높은 실용 연구를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성공시킨 연구로는 굿이어타이어와 개발한 폐타이어 활용 기술, 킴벌리클라크와 연구한 기저귀 관련 재료, 석유업체 토탈피나엘프와 개발한 합성수지 공정 개선 등이 꼽힌다. 그는 산업 연구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 “학계의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형 연구과제나 남들로부터 각광 받는 과제는 제 차례가 아니었습니다. 세계적인 연구 중심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학파나 널리 알려진 그룹의 일원으로서 연구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요. 하지만 욕심 내지 않고 산업체와 연계되는 작은 과제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화공 분야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산업계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연구 위탁이 늘어났습니다.”

연구소에서 제자와 함께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오하이오대 제공
연구소에서 제자와 함께 실험을 하고 있는 모습. 오하이오대 제공
한국의 공대들에 줄 조언을 묻자 그는 “한국 상황은 잘 모른다. 다만 미국이 과학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산학협력 체제가 잘 굴러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교와 기업 간에 벽이 없습니다. 미국 기업들은 뛰어난 자체 연구소도 운영하지만 학교에도 연구를 맡겨 선의의 경쟁을 유발합니다. 기업은 학교와 손을 잡는 것을 격이 떨어진다거나 베풂의 차원에서 보지 않고 ‘투자한 만큼 걷어 간다’는 시각에서 봅니다. 연구실 회의 때 기업 담당자도 참석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렇다’는 의견을 내놓습니다.”

기초과학 탄탄해야 혁신-융합 가능

이 교수는 지금은 대기업과의 공동 연구를 주로 하지만 초기에는 학교 주변 작은 기업의 연구를 담당하며 실력을 키웠다. 처음 연구 생활을 시작한 애크런대는 주변에 자동차부품 업체가 많았다. 그는 “작은 기업의 연구를 하며 산업 현장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의 연구 환경도 오랜 불황에 따른 경기 침체와 자금 부족, 근시안적인 연구과제, 유행 연구 분야 쏠림 현상, 연구실과 강의실의 연계 부족 등으로 예전 같지 않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기초과학이 탄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빠른 과학기술 발전 속에서 ‘혁신’ ‘융합’ 같은 단어들이 많이 오르내립니다. 그렇지만 튼튼한 기초가 있어야만 혁신과 융합이 가능합니다. 성공한 우리 전통음식 비빔밥에서 보듯이 먼저 재료가 잘 준비되고 정성이 들어가야 오묘한 맛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교수는 연구의 대가이지만 연구실보다 강의실을 더 좋아한다고 했다. 아직도 칠판에 한가득 백묵가루를 휘날리며 강의를 한다. 강의 부담이 적은 석좌교수건만 지금도 매 학기 3과목씩 가르친다. 청각장애도 그의 강의 열정 앞에서는 장애물이 될 수 없다.

“저학년 학생들을 대강당에 한가득 모아 놓고 화공학 필수과목을 강의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다. 나 같은 구세대 학자가 미래 사회 리더들에게 지식의 전수식을 하는 것이 바로 강의인데 이보다 더 흥분되고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워싱턴에서

:: 이성규 교수 ::

―전남 강진 출생

―경기고,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

―1977년 미국 유학. 케이스웨스턴리저브대 박사

―애크런대(1980∼97년), 미주리대(1997∼2010년), 오하이오대 교수(2010년∼현재)

―2013년 11월 미국 과학공학 명예의 전당(ESHF) 회원 선정

―‘오일 셰일 테크놀로지’ 등 화공학 저서 11권 저 술, 화공학백과(ECP) 저술

―미국특허 34건, 국제특허 87건 보유

인터뷰=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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