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1450∼1850년 지구 소빙기 아시나요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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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빙기 시절의 런던을 묘사한 ‘템스 강의 빙상시장(1683∼1684)’. 주민들이 얼어붙은 강 위에 간이 상점과 시장을 열어 자본주의의 태동을 보여 준다. 토머스 와이크의 작품이다.
소빙기 시절의 런던을 묘사한 ‘템스 강의 빙상시장(1683∼1684)’. 주민들이 얼어붙은 강 위에 간이 상점과 시장을 열어 자본주의의 태동을 보여 준다. 토머스 와이크의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겨울에는 춥지만 여름에는 덥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구도 추위와 더위를 오고갑니다. 1450년부터 1850년까지 약 400년간 지구는 매우 추웠습니다. 이 시기는 1억∼3억 년 혹은 몇 천만 년 동안 추위가 계속되는 빙기(氷期)보다 훨씬 짧아서 소빙기(Little Ice Age)라고 부릅니다.

소빙기였던 17세기의 추위는 1만 년 전 인류가 농경을 처음 시작한 이래 가장 혹독했습니다. 학자에 따라 소빙기의 시작과 끝을 조금 다르게 주장합니다. 소빙기의 추위가 전 지구의 기후를 온도계로 직접 측정한 결과라기보다는 여러 기후 자료를 세밀하게 분석하여 추정한 결과이기 때문이죠.

오늘날 지구 온난화로 생태계가 변하듯이 소빙기에도 그랬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감귤 재배 지역이, 유럽에서는 포도 재배 지역이 더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발트 해와 조선의 바다에서는 대구나 청어 같은 한류성 어종이 흘러넘쳤다가 소빙기가 끝나면서 격감했습니다. 밥상의 음식이 달라짐에 따라 음식 문화도 변했고 한랭기후 때문에 두꺼운 옷을 중시하는 복식 문화로 변화했습니다.

또한 소빙기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오고 봄이 늦게 왔습니다. 여름에도 서늘하거나 심지어 눈이 내렸고, 아열대의 양쯔 강(창장 강)과 런던의 템스 강이 얼어붙기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작황이 좋았을 리 없죠.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흉작과 기근이 속출했습니다. 조선에서도 대기근이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그중 하나는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입니다. 6월까지 서리가 내렸고 9월에 다시 서리가 내렸습니다. 이상저온으로 인한 냉해 때문에 보리, 밀, 조, 기장의 작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죠. 굶주린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유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김성우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 전체 인구의 11∼14%에 해당하는 약 140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런 대기근 시기에는 다른 사람, 심지어는 자식을 죽이고 먹는 식인(食人) 행위가 널리 퍼졌습니다. 기근과 피해는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유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여러 국가는 소빙기의 추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까요? 기후에 대한 정확한 과학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히 추워졌지만, 단기적으로 기후가 다시 따뜻해졌고 날씨가 변덕스러웠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지구온난화 속에서도 갑자기 혹한의 날씨가 나타나듯이 말이죠. 많은 국가는 한랭의 장기적 추세를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기적으로 변덕스러운 기후와 날씨에 대한 미봉책만 세우고 장기적인 구조 조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기적인 따뜻한 기후 때문에 인구가 다시 증가했기 때문에 태평성대가 다시 찾아왔다고 착각했습니다.

소빙기의 장기적인 한랭화 피해는 이뿐 아니었습니다. 온난화 시기에는 잦은 가뭄이 찾아왔던 반면에, 한랭화 시기에는 여름이나 겨울에 비와 눈이 많이 내려 홍수가 발생합니다. 홍수 때문에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같은 전염병이 확산됐습니다. 전염병은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 사이에서도 만연해 가축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토양을 유실시킨 홍수와 함께, 가축의 감소는 거름 생산량의 감소로 이어져 흉작과 기근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경작지의 감소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소빙기의 재해와 기근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많은 국민이 유민이 됐고 국가 재정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또 정부 기능이 마비됐고 국가 지배체제의 전복을 기도하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교체는 다른 요인이 있지만 소빙기의 기후변화와 자연재해로 인한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구황(救荒)에 인색했던 명조와 달리, 청조는 기후변화에 민감했고 재해에 신속하고 실질적으로 대처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와 같은 정권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했으니까요. 무기와 전쟁의 전략전술에 급진적 변화를 가져온 유럽의 군사혁명은 기존 권력을 더욱 확고하게 했습니다. 물론 군사비의 증액으로 구황 예산은 대폭 감축됐고 국민은 늘어난 증세 부담으로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유럽 국가는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으로 사회적 공포를 조장하거나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함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폭압적인 국가 권력은 사회뿐 아니라 종교와 학문까지 억압했습니다. 국가는 정통 종교를 강화하고 다른 종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순종을 강요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소빙기 동안 많은 사람이 이단과 마녀로 몰리면서 처형됐습니다.

소빙기의 한랭화와 생활 양식의 변화, 그리고 사회의 억압적 풍토는 누구보다도 화가들에 의해 예리하게 포착됐습니다. 잔뜩 찌푸린 하늘과 앙상한 나무, 기운 빠진 사냥꾼 그리고 엄청난 양의 눈.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은 단순한 겨울 풍경화가 아닙니다. 혹한의 겨울과 폭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연결시킨 소빙기의 정치화(政治畵)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소빙기에도 자유와 관용을 끝까지 옹호한 영국은 근대 과학이 태동하는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도그마로 작동했던 오래된 지식이 타도되고 객관성을 옹호하는 새로운 지식이 출현했습니다. 때로 역사의 큰 그림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기후처럼 장기적인 역사 추동력이 있기 때문이지만 삶의 근본적인 가치가 무엇이며 역사의 장기적인 비전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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