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인생, 이렇게 꼬여도 되나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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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영화가 좋고 가을에는 애틋한 영화가 그만이듯, 알맞은 상황에서 알맞은 영화를 보면 우리의 내면을 치유하는 놀라운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자, 지금부터 시추에이션별로 보면 딱 좋은 최근 영화들을 소개한다.

먼저, 요즘 되는 일 하나 없이 인생 배배 꼬인다며 짜증 내는 분들을 위한 영화. ‘더 헌트’ ‘테이크 쉘터’ ‘사이드 이펙트’를 강력 추천해드린다.

‘더 헌트’는 건실한 유치원 남자교사가 “선생님한테 성추행 당했다”는 원생의 새빨간 거짓말에 지역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며 인생이 제대로 꼬인다는 얘기. ‘테이크 쉘터’는 폭풍에 마을이 초토화되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던 남자가 ‘이것은 신의 계시’라고 여기고 막대한 은행 빚을 내어 자기 집 앞마당에 방공호를 지으면서 동네에서 혼자 ‘미친놈’ 취급을 당한다는 내용이다(결국 마을엔 진짜로 폭풍이 밀려온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주인공인 ‘사이드 이펙트’는 자신이 처방한 우울증 치료약을 먹은 여자 환자가 흉기로 남편을 살해한 뒤 “의사가 처방한 약의 부작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주도면밀하게 의사에게 뒤집어씌운다는 줄거리. 이 영화들을 보고 나면 ‘나는 범접하지도 못할 만큼 억울하고 인생 안 풀리는 놈들이 여기 있구나’ 하는 위안을 얻게 된다.

반대로 ‘가을을 맞아 뭔가 쓸쓸하고 여운이 남는 감성 체험을 해보고 싶다’는 분들을 위한 영화도 있다. 폭력에 억압받다가 결국 머리가 살짝 돌아버린 광대가 피의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스페인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와 치매인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남편이 결국 아내를 살해하고 어디론가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충격적 결말을 담은 프랑스 영화 ‘아무르’는 보고 나면 여운이 남다 못해 찝찝해서 사흘 동안은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묘한 감성적 부작용을 경험하게 된다.

다이어트에 자꾸만 실패하는 분들께 ‘특효’인 영화도 있다.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등 피 칠갑 영화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일본 감독 기타무라 류헤이의 신작 ‘노 원 리브스’와 ‘매니악: 슬픈 살인의 기록’을 꼭 보시라. ‘노 원 리브스’는 극악무도한 악당 패거리가 길 가던 나그네 하나를 없애려 했는데, 알고 보니 이 나그네는 100배 더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살인마여서 악당들이 모조리 살육을 당한다는 얘기.

마이클 더글러스의 ‘느끼한’ 게이 연기가 일품인 영화 ‘쇼를 사랑한 남자’.
마이클 더글러스의 ‘느끼한’ 게이 연기가 일품인 영화 ‘쇼를 사랑한 남자’.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 프로도를 연기한 일라이저 우드가 연쇄살인마로 변신한 ‘매니악’은 살인마의 1인칭 시각에서 촬영한 매우 실험적인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내가 살인마가 되어 상대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는 진귀하고 지저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참, 마이클 더글러스가 게이 피아니스트로 출연해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놀라운 작품 ‘쇼를 사랑한 남자’도 다이어트에 효과적. 더글러스의 동성애자 연기(특히 그가 동성 애인과 거품목욕을 함께 하고 “너의 행복은 나의 전부란다”라고 속삭이는 대목은 압권이다)가 어찌나 느끼한지 김치 외에는 어떤 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혹시 ‘뭔가 처절한 배신감을 느껴보고 싶다’는 피학적인 분도 계신지? 이런 분들께는 라이언 레이놀즈와 제프 브리지스가 불량 유령들을 잡는 ‘사후세계’의 경찰 콤비로 나오는 ‘R.I.P.D.: 알.아이.피.디.’와 미남배우 애슈턴 커처가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로 출연한 ‘잡스’를 추천한다. 우리의 엄청난 기대를 제대로 배신한 채 진정으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내용만 열거되는 이 영화들을 보다 보면 ‘끝까지 보는 자체가 인간승리’라는 생각마저 들며 분노가 끓어오른다. 로만 폴란스키가 연출하고 조디 포스터와 케이트 윈즐릿이 주연한 ‘대학살의 신’도 꼭 추천. 뭔가 엄청나게 기대하게 되는 제목 및 주연배우들이지만 ‘학살’은커녕 거실 소파에 앉아 끊임없이 조잘조잘 수다만 떠는 모습이 80분 러닝타임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엔 배신감을 넘어 갱년기에만 느낄 수 있다는 무기력감까지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눈은 피로한데 영화는 보고 싶다’는 모순적 내면을 가진 분들을 위해 추천해드리는 영화. 바로 홍상수 감독의 신작 ‘우리 선희’다. 등장인물들이 ‘행동’은 안 하고 시종 조잘조잘 ‘말’만 해대는 탓에 눈 감고 귀로만 들어도 다 되는 라디오 스타일의 영화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더 헌트#테이크 쉘터#사이드 이펙트#미드나잇 미트 트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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