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uki, Murakami/이 남자가 사는 법]반듯한 일상, 거기에 더해진 자유로움… 문득 달리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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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칼럼니스트

지속적인 출간, 33차례의 마라톤 완주가 보여주듯 하루키는 자신의 룰을 성실하게 지키며 삶을 꾸려간다. 동아일보DB
지속적인 출간, 33차례의 마라톤 완주가 보여주듯 하루키는 자신의 룰을 성실하게 지키며 삶을 꾸려간다. 동아일보DB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87년, 나는 일본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처음 만났다. 당시 선풍적 인기였던 선명한 빨강 초록 커버의 ‘노르웨이의 숲’은 애틋한 연애담이라 부모님 몰래 매일 밤 조금씩 나눠 읽었다. 그로부터 26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매일 밤 그를 읽는다.

하루키가 오래도록 수많은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던 것은 비단 그의 인기나 스토리텔링의 흡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작품과 자기 자신을 통해 하나의 분명한 ‘스타일’을 제시했다. 매체에 얼굴을 드러내길 꺼리는 나름의 신비주의 작가인 하루키의 관점과 가치관, 라이프스타일에 독자들은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루키는 기존에 사람들이 접하던 전형적인 작가상과 근본부터가 달랐다. 그는 ‘노동자형’ 작가였다. 속세적인 밥벌이에 신경을 안 쓰는 ‘풍운아형’ 작가가 대세인 일본 문단의 분위기와 달리 그에게는 작가 데뷔 전 7년간의 치열한 노동의 세월이 있었다.

겨우 스물둘의 나이에 와세다대 동창이던 아내 요코 씨와 결혼 후, 재즈카페 ‘피터 캣’을 직접 운영했는데 당시의 힘든 육체노동 경험이 글쓰기를 향한 그의 태도를 보다 정직하고 강인하게 만들었다. 가령 작가업이 자유롭다고 해서 ‘쓰고 싶을 때 쓰는 것’이나 ‘영감이 찾아올 때 쓰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쓸거리가 생각 안 나도 그는 자신이 흠모하는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반드시 일정 시간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가게를 운영한다는 것이 그랬다. 오늘 기분이 좀 안 내킨다고 영업을 안 할 수는 없다. 노동이란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고상한 문학적 취향이나 자유분방한 풍류라기보다 차라리 노동과 수행에 가까웠다. 탈권위주의적인 태도는 그의 문장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화려한 미사어구보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단어를 사용해 재미있고 깊고 복잡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려고 애썼고, 비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비범한 이야기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평범한 이야기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비범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29세에 첫 소설을 쓴 이래 순수문학 한 길을 고집하기보다는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은 물론이고 그 사이사이 논픽션, 기행문, 르포, 에세이, 스포츠취재기, 재즈에세이, 상담칼럼, 미국문학서 번역 등 어깨 힘을 빼고 다채로운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것도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는 그의 태도에서 비롯했다.

일본 문단의 획일주의와 철저히 거리를 두며 그는 한 명의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탈리아나 그리스, 미국 등지에서 마음껏 글을 썼다. 갓 30대로 진입해 본격적으로 글을 써나가려는 무렵 그에겐 일본 사회나 일본 문학 환경의 제도적인 억압과 권위에서 벗어나 ‘개인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하루키의 자유는 성실하고 반듯한, 어쩌면 금욕적이기까지 한 일상을 전제로 했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도 그의 일상생활은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전 4시에 깨어나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쓴다. 하루에 원고지 20매를 쓴다. 오전 10시까지 일한 후, 10km를 달리고 한 시간 수영한다. 일단 정하면 변명하거나 투덜거리거나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 나갔다. 건강한 육체에 글쓰기에 필요한 ‘다크’한 정신이 깃든다고 믿었다. 오후 2시부터는 방전 및 재충전의 시간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보를 하거나 중고 음반가게에 마실을 나갔다. 귀갓길에 단골 생선가게나 야채가게에 들러 장을 봐와서 푸치니의 오페라를 들으며 맥주나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소박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그의 소설 주인공들도 규칙적이고 절제된 일상을 보내는데 그것은 사사로운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이 실은 세상의 질서와 선의를 지탱시키는 귀중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발이 땅바닥에 닿아있는 감각을 존중했다.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유지하는 데는 꾸준함과 일관성도 뒷받침되었다. 지속적인 장편소설 출간이나 33번에 걸친 마라톤 완주도 그가 오랜 시간을 들여 스스로를 심화시킨 결과다. 그는 말하자면 몸집을 쓸데없이 충동적으로 부풀리는 대신 끊임없이 제 자리에서 보다 선명하게 재생해 나가는 사람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많은 작품을 함께 해 온 단짝 일러스트작가 안자이 미즈마루에 의하면 하루키는 ‘굉장히 낯을 가리지만, 인간관계의 깊이에 대해선 완벽한 그 무언가가 있다’고 귀띔한다.

‘한번 사귀면 진짜 오래간다’고 하는데 이는 고단샤 출판사의 편집자인 사이토 요코 씨가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시작해 무려 25년이라는 세월을 한결같이 담당 편집자로서 함께 일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나는 그녀와 직접 통화를 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매섭도록 카리스마 있다!). 물론 10대 때 만나 연애결혼한 부인과는 현재 거뜬히 40년 지기다.

이렇게 모범적으로 성실하게 사는 하루키는 항간의 자기계발 멘토처럼 ‘노력하면 된다’ 식의 긍정주의자일까?

천만에. 도리어 그는 비관적 현실주의자다. 그에게 인생은 ‘어차피 지는 게임’이다. 계속 뭔가를 잃어가기만하는 절망의 여정이다. 어차피 허무하게 지는 게임이라면, 적어도 내 열정을 담을 수 있는 일을 일관성 있게 해나갈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살만할 수 있지 않을까, 기왕이면 규칙을 지키면서 제대로 지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애초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하고 기본적으로 모든 인생은 고독하다고도 그는 말했는데 고독이 존재하기에 어쩌면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소설을 쓰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루키의 주인공들도 늘 뭔가 자신들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서툰 그들은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그야말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보통의 삶을 반영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하루키와 그의 소설 주인공들의 태도는 어딘가 ‘소년’의 그것을 많이 닮아있다. 하루키의 해석에 의하면 ‘소년다움’이란 힘든 일이 닥쳐도 그것을 꾹 삼키고 헤쳐 나가는 것이며, 아무리 고독하다 해도 그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그 가운데 원시적인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믿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읽으며 감상적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가 소개하는 생소한 외국의 문화상품을 접하며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혹자는 치밀하고 감각적인 묘사 덕에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맥주나 위스키를 홀짝이거나 갑자기 스파게티면을 삶거나 고양이들을 키우게 됐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마라톤에 도전해 보거나 어느 날 먼 북소리의 부름을 받아 여행길을 떠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소싯적의 나처럼 글이 쓰고 싶어졌을 수도 있다.

하루키는 마치 조금씩 각도를 틀면 근사한 새 풍경을 보여주는 만화경처럼, 움직일 때마다 다방면의 매력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다. 그것이 그의 작품세계이든,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가 보여주는 삶의 태도에 깊은 공감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개인적’인 것은 결국 가장 보편적이었던 셈이다.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지고 진정한 소통을 기대하기가 힘들어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루키를 통해 하나의 명징한 삶의 방식을 배운다. 개인으로서의 나를 되돌아보고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지켜가는 것에 대해, 현실을 직시하고 어려움을 인정하되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내재된 힘에 대해. ‘당신은 지금 어느 역에 서있습니까?’ 하루키는 나지막이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나 굳이 대답을 기다리진 않을 것이다. 과묵하게 저마다의 길을 자발적으로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 역시도 자신이 가던 길을 묵묵히 걸어갈 것이다. 어쩌면 뛰어갈 수도 있다. 그는 말하자면 그런 남자인 것이다.

▼그의 열린 결말, 작가로서의 무책임함?▼
하루키를 향한 또 다른 목소리


유명해진다는 것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나를 싫어하는 사람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라고 일찌기 말했던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그 자신이었다. 하루키가 본격적인 관심, 그리고 비판을 받게 된 것은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에서 밀리언셀러가 된 다음부터였다.

문학 평론가들은 일제히 ‘무라카미 하루키 증후군’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발하며 나름의 혁신적인 작풍을 구사해오던 하루키가 갑자기 평범하고 흔해빠진 러브스토리를 쓴 것에 대해 비판했다. 또 그들은 하루키가 미국 문학과 문화의 영향을 너무 받아 해외 브랜드와 관련된 속물근성과 미국 팝문화를 숭배하는 사대주의가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에 겐자부로는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81회 아쿠타가와상 후보가 되었을 때 “외국의 번역소설을 너무 많이 읽고 쓴 것처럼 버터냄새가 난다”며 강하게 만류했으며 하루키가 “일본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고 단언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나르시시즘의 발현에 불과하다고 했다. 주인공들은 깊은 고뇌나 성찰이 없이 얄팍한 자기애적인 정신을 보여주며 그 빈틈을 그럴싸한 고유명사와 브랜드로 매꾸려 한다는 것. 인물뿐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풍기는 체념적 태도도 문제삼았다. 일본의 여성학계에서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하루키가 여성을 그려내는 방식이 성차별적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 평론가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9년에 출판된 ‘상실의 시대’가 당시 젊은 세대의 정서에 부합하며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다. ‘일본 책은 국내에서는 안 팔린다’라는 징크스를 깬 것이 하루키였다. 그러나 그의 급격한 인기를 경계한 목소리들도 있었다. 문학의 계몽적 역할을 믿는 문학계 인사들은 하루키 소설을 표피적인 오락소설로 치부하고 진지한 고민이 없다고 일갈했다. 허세와 겉멋으로 가득한 ‘된장소설’로 폄하되기도 했다. 하루키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는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는 하루키의 작품을 두고 “약삭빠른 글장수의 책이지 결코 예술가의 책은 아니다”라며 많은 젊은 세대들이 애독서로 하루키의 책을 거론하는 풍토를 개탄했다. ‘팝소설’이자 ‘음담패설적인 소설’이라는 표현까지 서슴지 않으며 독자들의 독서 편식에 우려를 표했다.

하루키의 ‘안티’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우선 그들은 하루키 소설의 주요 테마인 상실이나 고독 같은 개념이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그의 개성이라 할 수 있는 맛깔난 비유들이 닭살스럽다고 지적한다. 등장하는 여자들이 남자 주인공과 너무 쉽게 동침하는 작위성에 대해서도 못마땅해한다. 모호하고 열린 결말들에 대해서도 ‘작가로서 무책임하다’는 견해도 있다.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해서는 한 젊은 남성 독자가 일본 아마존닷컴 후기에 “고독한 샐러리맨의 오징어 냄새나는 망상소설”이라고 일갈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하루키는 자신에 대한 비평은 일절 읽지 않는다며, 소설가는 마땅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책을 쓸 권리가 있고 비평가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비평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했다. 유력한 차기 노벨상 후보자로서의 위상만큼이나 그를 향한 매섭고 날카로운 시선은 앞으로도 계속 쏟아질 수밖에 없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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