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혜 교수, 사대부 한글제문 첫 공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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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구나, 두어 줄 글로 어찌 누이의 덕행을 다 말할까”

1746년 유학자 기태동이 누이동생의 죽음을 추모해 쓴 한글 제문. 18세기 호남 사대부가 쓴 한글 제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작성일자가 남겨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한글 제문이다. 정승혜 교수 제공
1746년 유학자 기태동이 누이동생의 죽음을 추모해 쓴 한글 제문. 18세기 호남 사대부가 쓴 한글 제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작성일자가 남겨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한글 제문이다. 정승혜 교수 제공
“아, 애통하구나. 술 한잔을 올리고 우는 것이 어찌 내 애통함을 사하며, 두어 줄 글이 어찌 다 누이의 덕행을 기록하겠는가.”

18세기 중반 호남지방의 사대부가 죽은 누이를 추모하며 애끊는 심정으로 쓴 한글 제문(祭文)이 공개됐다.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를 담은 글인 제문은 장례 때와 소상(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 대상(죽은 지 2년 만에 지내는 제사) 때 낭독한다. 대부분 한문으로 쓰였으며, 한글 제문의 경우 주로 19, 20세기에 영남지방의 여성이 썼다. 18세기 호남지방의 사대부 남성이 쓴 한글 제문이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구체적인 작성 날짜가 기록돼 전하는 한글 제문 중에 시기가 가장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정승혜 수원여대 교수(국어사)는 10일 경북대에서 열린 국어사학회 학술대회에서 이 한글 제문을 공개했다. 1745년 전의 이씨 집안으로 시집간 행주 기씨가 죽자 이듬해 5월 24일 기씨의 오빠인 유학자 기태동(奇泰東·1697∼1770)이 작성한 것. 당시 49세였던 기태동은 32세로 세상을 떠난 누이를 잃은 애통함과 유교 덕목을 잘 따랐던 누이에 대한 칭찬을 두루마리 종이에 70여 줄에 걸쳐 썼다. 고급스러운 문장력이 돋보인다는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죽은 기씨의 시댁인 이신의(李愼儀) 종가에서 전해 내려온 이 한글 제문은 다른 고문서들과 함께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일괄 지정돼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한글 제문은 적절한 우리말 어휘를 구사해 한문 제문에 비해 더욱 애틋한 것이 특징이다. 기태동이 쓴 한글 제문에서도 어린 누이를 잃은 오빠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드러난다. “누이의 나이 겨우 서른둘인데 하늘은 어찌 우리 누이를 바삐 앗아가셔서 이 노쇠한 동기에게 육체는 마르고 심신은 다 스러지게 하는가. … 하늘이 높고 땅이 멀지만 이 한(恨)도 더불어 똑같이 길고, 강과 바다가 광활하니 이 회포도 더불어 한가지로 깊도다.”

한글 제문과 더불어 같은 내용의 한문본도 전한다. 한문본을 통해 한글 제문에서 해독이 어려운 어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한문본이 언제 씌어진 것인지, 번역을 누가 했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다. 정 교수는 “기태동은 한문이 익숙한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친숙한 집안 여성들도 제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쓴 것으로 보인다”며 “한글생활사와 국어사, 방언사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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