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무소유 시대]<3>일본 저성장 풍속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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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싶은 세상, TV에서 공짜로 웃겨주네… 개그맨 전성시대

2007년 휴대전화 서비스 광고에 처음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흰 홋카이도견 광고 시리즈. 아버지는 흰 개, 어머니와 딸은 일본인, 아들은 흑인이다. 앞치마를 두른 이가 가정부로 나오는 영화배우 토미 리 존스. 광고가 인기를 끌자 우주인 가정부, 엉뚱한 할머니 학생 등이 추가됐다. 소프트뱅크 광고 화면 캡처
2007년 휴대전화 서비스 광고에 처음 선보인 이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흰 홋카이도견 광고 시리즈. 아버지는 흰 개, 어머니와 딸은 일본인, 아들은 흑인이다. 앞치마를 두른 이가 가정부로 나오는 영화배우 토미 리 존스. 광고가 인기를 끌자 우주인 가정부, 엉뚱한 할머니 학생 등이 추가됐다. 소프트뱅크 광고 화면 캡처
《 “아니, 1주일 식비를 430엔(약 5000원)으로 모두 때울 수 있다고요?” “에∼.”(방청객들의 야유하는 소리) 그러자 개그맨 가스가 도시아키(34)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우선 쇠고기덮밥을 한 그릇 삽니다. 첫날에는 소스가 배어든 밥만 먹습니다. 둘째 날은 덮밥에 올려진 다진 파와 밥만 먹습니다. 셋째 날은 쇠고기를 절반만 먹습니다. 넷째 날에는 남은 고기 절반을 먹습니다. 다섯째 날은 덮밥그릇에 아직 남아있는 소스에 밥을 비벼 먹습니다. 여섯째 날은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서 고기 패티를 빼고 빵만 먹습니다. 일곱째 날은 남은 패티와 밥을 함께 먹습니다.” 》

그가 속한 개그 2인조 콤비 ‘오도리’는 전국에서 제일 웃기는 개그맨을 뽑는 일본 TV프로그램 ‘M-1 그랑프리’에서 2008년 우승을 차지했다. ‘절약 개그’로 불리는 이들의 개그에는 애환이 녹아 있다. “무명시절 주스를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물병에다 눈깔사탕을 하나 넣고 흔들어 단맛 나는 주스를 만들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깔깔 웃는다.

이들이 이름을 알린 ‘M-1 그랑프리’는 일본 개그맨 전성시대의 신호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2001년 1603개 팀이 참여했는데, 2010년에는 4835개 팀이 참여할 정도로 인기가 급증했다. 프로그램을 주최하는 일본 최대 예능 프로덕션인 요시모토코교(吉本興業)는 1912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회사로 소속 개그맨만 1800명이 넘는다. 이 회사 매출과 수익이 비약적으로 늘기 시작한 것은 버블이 붕괴된 1990년대 초부터. 2007년엔 연간 매출 2600억 원, 순이익 200억 원을 냈다. TV 개그 프로그램이 늘어난 데다 이들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만담을 즐기는 고객이 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2003년 ‘엔타노 가미사마(엔터테인먼트의 신)’를 비롯해 2004∼2005년 개그맨들이 단체로 나와 사람들을 웃기는 프로그램이 급증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상생활이 피곤할수록 서민들은 값싼 비용으로 또는 TV를 보면서 공짜로 웃고 싶어 한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트렌드에 민감한 광고업계와 기업의 마케팅도 소비자들의 이런 변화에 재빨리 대응했다. 제품 기능만을 돋보이게 하는 광고보다는 ‘일단 웃기는’ 광고가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콘셉트나 기능 자체에 재미있는 요소를 넣거나, 브랜드의 정체성 자체를 ‘펀(fun)’에 맞추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 통신회사 소프트뱅크의 광고. 부부와 1남 1녀로 구성된 평범한 가족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평범하지 않다. 어머니와 딸은 평범하지만, 아들은 흑인이고, 아버지는 개(犬)다. 심지어 근엄한 목소리로 말도 한다. 소프트뱅크는 새하얀 홋카이도견을 앞세워 200편이 넘는 상업광고(CM)를 제작하였고, 이 시리즈는 5년 넘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광고’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이 광고는 왜 개가 아버지인지 아직까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매회 귀여우면서도 엉뚱한 아버지의 활약에 웃음이 나올 뿐이다. 최근에는 주로 중후한 역할로 나오는 할리우드 배우 토미 리 존스를 이 집의 가정부 역할로 투입했다. 아무런 개연성도 없지만 소비자들은 예상 못한 캐릭터에 환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비슷한 흐름이 발견된다. ‘개그 콘서트’의 인기 캐릭터로 부상한 브라우니가 제일모직의 패션 브랜드 빈폴 모델로 발탁되더니 세계 최대 소비자 가전 전시회인 CES 2013에도 등장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편 일본에도 힐링 열풍이 거세다. 일본의 국민그룹 ‘스마프(SMAP)’가 불러 음악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해진 ‘세상에 하나뿐인 꽃’이란 노래가 발표된 것이 2003년이다. ‘넘버원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원래부터 특별한 온리원(Only One)이니까’라는 이 노래의 가사는 마치 최근에 한국에서 유행하는 힐링 서적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 같다. 연예인들도 독설형이 아니라 엉뚱한 이야기로 웃음을 유발하거나 상대방이 실수해도 ‘괜찮아, 괜찮아’ 하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치유형이 대세다.

한석주 노무라종합연구소 서울 컨설턴트   
정리=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일본#저성장#개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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