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형오]반구대 ‘물고문’부터 중단시켜라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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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전 국회의장
김형오 전 국회의장
국회의장 시절이던 2010년 3월 26일 나는 국회의장실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 보존을 위한 특별대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소속 정당을 위해 기자회견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국회의장으로서 이런 회견을 하는 것이 적당한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사라져가는 암각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자회견뿐만 아니라 졸필에 이곳저곳 언론사에 특별대책을 촉구하는 기고까지 썼으니 많이 다급했었나 보다. 그것이 벌써 3년 전이었다.

그 당시에도 이미 10여 년간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책임 전가만 하다 그 지경이 되었는데 또다시 3년을 허송세월해 이제는 윤곽조차 잘 안 보인다고 한다. 어느 학자는 이대로라면 수십 년 후에는 암각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하는데 단언하건대 수십 년이 아니라 불과 몇 년이면 그 같은 상황을 맞이할 것이다.

선사시대 우리 선인(先人)들이 바위에 새긴 고래 호랑이 표범 사슴 멧돼지 사람 가면 배 어구 등 300여 점에 가까운 그림들이 오늘도 내일도 하나씩 물속에서 형체가 사라지고 있다. 그 하나하나가 세계적 관심거리지만 특히 수염고래, 새끼 밴 고래, 세계 최초의 고래잡이 민족임을 증명하는 작살 박힌 고래 등은 모양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됐다. 문화재청은 2017년 반구대 암각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겠다고 하지만 형체가 없는데 무슨 재주로 등재를 시킨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비극은 1971년 반구대 암각화가 발견되기 전에 사연댐이 축조(1965년)된 데서 비롯됐다. 댐에 물이 차면서 암각화는 물속에 잠기고 말았다. 1년 중 물이 차는 8개월은 여지없이 ‘물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보존의 주체인 문화재청과 울산시의 주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10여 년을 해오던 소리를 아직도 되풀이하고 있다.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들은 반구대 암각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면 자연 상태가 훼손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암각화를 물속에 잠기게 하는 사연댐 수위를 당장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울산시는 시민의 식수 보전 대책 없이 댐 수위만 낮추는 것은 대책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한다. 그래서 생태 제방을 먼저 쌓아 암각화를 보존하자고 한다. 이에 문화재청은 제방이나 둑을 쌓으면 주변 경관이 훼손돼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어렵다고 말한다.

2011년 7월에도 울산시와 문화재청, 국회, 국무총리실 등 관련 부처들이 모두 모여 대책 회의를 열었지만 결론은 ‘다음에 다시’였다. 이게 무슨 짓들인가. ‘끝장 토론’이라도 벌여 즉각 조치를 취했어야 할 긴급 현안은 결국 아무런 대책이나 합의 없이 다음으로 미뤄졌고 지금에 이르렀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부터 일단 건져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같은 대립이 지속되면 해결은 난망하다. 문화재청과 울산시가 서로 싸우는 데 급급해하지 말고 일단 암각화부터 물에서 건져내야 한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그 다음 일이다. 따라서 우선 물막이 제방을 설치해 물을 빼내고, 물먹은 바위를 건조시켜야 한다. 암각화는 무른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다. 육지에 있어도 자연 마모가 생기는데 물속에 있으니 퇴화가 가속되는 것이다.

암각화를 물에서 건져낸 다음 사연댐 수위를 낮추고 대체 식수원을 마련하자. 그런 후 물막이 보를 해체하면 암각화는 원상회복된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프랑스 라스코 동굴이나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과는 달리 사람들의 접근성도 뛰어나다. 인근의 천전리 각석(국보 147호)과 연계하면 세계적인 문화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두가 먼저 암각화를 물에서 건져낸 다음 생각할 일이다. 상황은 급박하지만 아직도 늦지 않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후 후회하지 말고 반구대에 대한 ‘물고문’부터 중단해야 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
#울산 반구대 암각화#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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