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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교수, 현대철학 거장 獨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와 자택 대담]<상>선천적 ‘언어장애’가 약자도 배려하는 의사소통이론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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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교수, 현대철학 거장 獨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와 자택 대담]<상>선천적 ‘언어장애’가 약자도 배려하는 의사소통이론에 영향

동아일보입력 2012-07-11 03:00수정 2012-07-18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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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67·사회학·중민사회이론연구재단 이사장)가 독일 뮌헨 근처 슈테른베르크에 자리한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83)의 자택을 최근 방문했다. 하버마스 교수와 한 교수 부부는 오랫동안 친분을 이어온 사이다. 한 교수는 하버마스 교수의 알려지지 않은 개인사와 소통정의론에 대해 6시간에 걸쳐 대화한 내용을 정리해 동아일보에 보내왔다. 한 교수는 2006년에도 ‘지식사회가 가야 할 길’을 주제로 하버마스 교수의 자택에서 대담을 나눈 뒤 동아일보에 글을 실은 바 있다. 두 학자의 대담을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수행하는 소통정의를 강조하며 “누구도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는 포용적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상진 교수 제공
하버마스 교수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석학이다.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도 학문 활동으로 분주하다. 지난해 출간된 저서 ‘유럽연합의 위기’는 15개 언어로 번역됐다. 그가 거둔 학문적 업적의 핵심에 소통이론과 정의이론이 있다. 한국의 대중은 소통 부재에 처했고 공정사회를 갈구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그의 이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버마스 교수의 진단이 궁금했다.

내가 하버마스 교수와 교류를 시작한 것은 1988년이었다. 1996년 나의 주도로 그가 처음 방한한 이후 상당히 친해졌다. 그래서 그와 인터뷰도 여러 번 했다. 이번에 그의 자택을 방문한 목적은 그의 사상을 이론보다는 인간적인 터치로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그의 개인적 체험을 물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아내 심영희(한양대 사회학과 교수)와 함께 지난달 26일 독일 뮌헨에서 기차를 타고 하버마스 교수의 사저가 있는 슈테른베르크로 갔다. 우리 둘은 하버마스 부부와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쾌청한 날씨에 풍경도 좋아 우리는 걸어서 하버마스 교수의 집을 찾아갔다. 이렇게 간 것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역에 도착해 전화하면 그가 차로 마중을 나왔다. 우리가 불쑥 도착하자 부인 우테 여사가 깜짝 놀라며 반겼다. “위르겐은 기차역에 갔어요. 2시에 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차! 역에서 전화할 것을! 사실은 전화하려 했으나 시골 역의 공중전화가 고장 난 상태였다. 우리가 전화도 걸지 않았는데 그가 역으로 나와 기다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버마스 교수를 만나 우리는 곧 대화를 시작했다. 하버마스 부부는 16년 전의 한국 방문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특히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의 전산화를 이끌던 종림 스님과의 만남을 일생에서 가장 ‘황홀한 대화’로 회상했다. “동서양의 문화를 넘나들면서 나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황홀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광주에서 학생들과 만나고 5·18민주묘지에 들렀을 때 그는 민주화의 열기가 온몸에 느껴졌다고 했다.

독일 슈테른베르크에 있는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왼쪽)의 자택 테라스에서 한상진 교수가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상진 교수 제공
나는 물었다. “이전에는 억압된 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소통의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요. 다들 자기 이익을 지키고자 큰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소통은 없어요. 갈등과 대립이 증가할 뿐입니다.” 하버마스 교수는 독일의 경험을 소개했다. 1949년 나치체제의 유산을 청산하고 서독은 민주제도를 도입했지만, 적과 동지를 이분법으로 가르는 정치문화를 개선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민주제도 아래서도 상대를 동반자로 보지 않았습니다. 상대의 관점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자기가 옳다는 관점에서 보았지요. 이런 냉전적 흑백논리를 극복하는 데 독일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재빨리 보탰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사회는 역동적이지 않습니까? 뉴미디어의 영향력도 강하고요. 한국 정치는 오늘날 새로운 분기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소통과 권력을 혼동하지 말라는 하버마스 교수는 ‘소통정의’를 주장한다. 소통정의는 분배정의, 사법정의 등과 함께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메시지를 담고 있다. 분배정의를 위해서는 유능한 정치인 또는 행정가가 경제적 불평등을 줄이는 좋은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 사법정의를 위해서는 법의 정신에 충실한 법관 또는 법조인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잘못된 법 집행을 뜯어고치는 것이 필수다. 하버마스 교수는 이런 정의와 함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수행하는 소통정의에 관심을 쏟는다. 소통정의의 진정한 주체는 정치인도 관료도 법률가도 아니고 바로 시민이기 때문이다.

하버마스 교수는 3대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누구나 배제되는 사람 없이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어떤 주장이건 관점이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상대의 말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공평한 상보성을 보장해야 한다. 소통정의의 핵심은 바로 상보성의 원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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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권력자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 자기 말을 하는 데 바쁘고 자신의 취향대로 의제를 설정하거나 독점하려 한다. 이 때문에 하버마스 교수는 강자의 언어를 왜곡된 소통이라며 비판했다. 그 대신 그는 누구도 무시당하거나 차별받지 않는 포용적 소통을 강조했다. 전후 독일에서 그가 걸어온 길을 ‘좌파 자유주의’로 불렀다.

하버마스 교수의 역설은 그가 입술 입천장이 갈라진 구순구개열, 일명 언청이로 태어났다는 데 있다. 이 병은 현대의학의 수준으로는 태어나면서 완벽하게 고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유년기에는 불가능했다. 흡사 늑대소리 같은 발음을 내는 이 병을 나치정권은 유전병으로 간주했다. 하버마스 교수는 유년 시절 여러 번 수술을 받았다. 이에 관한 기억을 2004년 일본 교토(京都)상을 받으면서 처음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자연히 나의 호기심도 커졌다. 언어장애가 소통이론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그의 학문적 성취는 타고난 실존의 조건을 극복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거둔 인간적 승리가 아닐까. 그러나 그는 겸손했다. “특별히 대단한 점은 없어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들과 정상적인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체험의 역할을 부정하진 않았다. “나의 포용적인 소통이론에 유년기의 심층심리가 작용했다는 해석은 사실 이탈리아에서 심리학자로 일하는 나의 아들 틸만이 이미 제안했던 것입니다.”

이 대화로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의 소통이론은 강자가 대변하는 패권적 세계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반대로 약자, 소수자, 장애인 등의 동등한 참여를 옹호한다. ‘정상인’이 이끄는 주류 소통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열린 소통, 주류에서 밀려난 타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열린 소통을 지향한다. 그러면서도 약자에 대한 배려를 약자의 특수한 관점이 아니라 보편적 이론에 접목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에 그의 진정한 학문적 고뇌와 매력이 있다고 느꼈다.

하버마스 교수는 자신의 청소년 시절 체험도 소개했다. 그는 누구나 가입했던 ‘히틀러 유겐트’(나치의 청소년 조직)의 정규 복무에 언어장애로 인해 동참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응급처치반의 하급 의무요원으로 일했다. “주말이 되면 애들이 집단으로 시내를 행진하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나는 그게 정말 너무 싫었어요. 나는 정규 복무를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14세였던 그의 업무는 같은 반의 어린 학생 몇 명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중 한 명이 두 살 아래의 한스 울리히 벨러였다. 그러나 벨러는 자주 교육에 나오지 않았다. 하버마스는 통상의 절차로서 우편엽서 크기의 미리 인쇄된 복무요청서를 1943년에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벨러는 이 문건을 일기장에 끼워 넣고 수십 년간 보관했던 것이다.

유명한 역사학자로 성장한 벨러는 1970년대 하버마스와 하룻밤을 지내면서 전쟁 경험을 회고하던 중 그 문건을 언급했으며 뒤에 이것을 찾아 그에게 보냈다. 다음 해에 그 문건에 관해 묻자 부인 우테 여사가 “위르겐이 이것을 삼켜버렸어요”라고 응수했을 때 모두 한바탕 웃었다. 누가 들어도 재치 있는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성 루머가 번지기 시작했다. 나치체제를 비판했던 하버마스 교수가 사실은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였으며 나치체제의 성공을 확신하고 지지했다는 해석이었다.

이 소문은 10년, 20년을 지나면서 새로운 변종으로 부풀려졌고 독일의 언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과 ‘디 차이트’에 사실인 양 보도됐다. 나아가 독일의 언론인 출신 역사학자 요아힘 페스트는 자서전에 마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하는 것처럼 이 소문을 적었다. 우테 여사의 농담은 ‘증거 인멸’로 둔갑했다. 이에 벨러는 진상을 밝히는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하버마스 교수는 소송을 제기했으며 법원은 관련 부분을 자서전에서 삭제하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태를 종결시켰다.

이 사건은 과거 청산에 얽힌 정치적 동기를 잘 보여준다. 물론 과거 청산은 미래를 위해 어디서나 중요하다. 그러나 정의는 문서 자체에 있지 않다. 문서의 일방적 해석에 있지도 않다. 정의는 소통과정에서 확립된다. 설사 범죄자, 가해자라 해도 말할 기회를 갖는 것은 정의에 필수적이다. 상보성의 원칙, 즉 상대의 관점을 방법론적으로 고려하는 데서 정의의 절차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통정의는 법에 의한 징벌로 끝나지 않는다. 권력으로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하려 한다. 하버마스 교수의 소통정의는 이 점에서 독보적이다.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소통 부재와 불공정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귀중한 영감과 자극을 준다.

: : 하버마스는 누구 : :

생존한 지성 가운데 최고의 석학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위르겐 하버마스는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하이델베르크대와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 및 사회학 교수를 지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제자로 ‘비판이론’을 계승했으며,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정립해 인간의 합리적 의사소통 능력이 자본과 권력의 기계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세계를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도 책 출간과 언론 기고 등 활발한 저술활동을하고 있다.

슈테른베르크=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한상진#교수#위르겐 하버마스#의사소통행위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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