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그리스인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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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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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요즘 같은 때 그리스 국민을 변호해 주면 욕먹기 십상일 것이다.

사실 그리스 국민의 행태는 이중적이고 이기적으로 비친다. 국민 80% 이상이 유럽연합(EU)에 남기를 원하면서도 정작 6일 총선에선 EU의 긴축 요구를 거부하는 극단주의 정당들에 표를 몰아줬다. EU의 도움을 받아 빚더미에서 벗어나고는 싶지만 긴축의 고통은 감내하지 않겠다는 얌체 심보다.

국민들,정치인 부패로 공동체 불신

그리스 TV는 지난해 봄 한국인들은 외환위기가 터지자 금 모으기를 했다며 국민들에게 미래를 위해 한마음이 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당시 아테네 시내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방송을 보던 시민들은 “뭐 하러 그런 짓을 하느냐”며 냉소했다.

도시국가로 출발한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를 1000년, 터키의 지배를 400년 받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이탈리아의 침공에 이어 나치에 점령됐다. 끊임없이 내전을 겪었고 1974년까지 군사독재에 시달렸다. 그런 과정에서 국가관은 희박해지고 공동체와 미래보다는 개인과 현재를 중시하는 풍토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리스인들이 국가와 공동체를 불신하고 그것들에 무관심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민주화 이후 정치지도자들의 부패와 포퓰리즘적 정책이었다. 워낙 부패가 심하다 보니 세금을 내면서도 공익을 위해 쓰일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엉뚱한 놈 배 불릴 돈을 강탈당한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한국인의 금 모으기를 냉소한 한 대학원생은 “정치인들은 항상 부패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는 사람들인데 왜 국민만 국가를 생각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다행히 기성 정치지도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젠 극우 극좌 정당들이 포퓰리즘의 바통을 이어받아 선동하고 있다. 강경좌파 연합인 시리자당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대표는 총선 때 빚 상환 중단, 긴축 중단을 요구하면서 “우리가 빚을 상환하지 않더라도 유로존이 우리를 퇴출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시리자당은 일약 원내 제2당으로 부상했다.

유권자들이 달콤한 단기이익을 제시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고, 그리하여 공동체의 상황이 더 나빠지는 악순환은 현행 대의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결정적 취약성이다. 민주주의의 발원지인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절정에 달한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그리스 사태는 세계적 이슈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개별 국민국가(The Nation-State) 유권자들이 지구촌 공동의 이해관계와 배치되는 선택을 해 전체가 위기에 빠져드는 위험한 메커니즘을 보여줬다. 세계화 시대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의회민주주의보다 나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직접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 가능성을 닫아둘 경우 그 내부에서 권력의 횡포와 부패가 어떻게 자라나는지는 최근의 중국 보시라이 사건이 너무도 극명히 보여줬다.

지도층 솔선수범해 신뢰 쌓아야

결국 해답은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국민들이 공동체에 신뢰를 쌓아가도록 하는 것밖에는 없다. 개개인의 절제가 공동체의 파이를 키우고 그 열매가 본인에게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요즘 우리 사회 좌파 일각에서 “외환위기 때 금 모아서 재벌만 살찌워줬다”는 식의 냉소적 시각이 나오는 것은 위험한 신호다.

그리스 국민이라고 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조르바는 거칠 것 없는 자유, 개인의 일상의 행복에 집중하지만 무책임, 이기주의와는 결이 다른 DNA다. 무슨 음식을 특히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무거나 다 좋아한다”며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고 하는 건 큰 죄악”이라고 답한다.

“왜요? 골라서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신가요?”

“안 되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 안 됩니까?”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지요.”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그리스#국민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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