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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엄마는 왕년에 걸그룹… 하지만 내 인기보다 아픈 네가 소중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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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엄마는 왕년에 걸그룹… 하지만 내 인기보다 아픈 네가 소중했단다”

동아일보입력 2012-05-17 03:00수정 2012-10-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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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스터즈 멤버 김희선 씨, 뇌성마비 딛고 美 대학교수로 자란 딸에게 쓰는 편지
14일 오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장항동 자택에서 만난 ‘이시스터즈’ 멤버 김희선 씨는 “소녀시대 같은 요즘 걸그룹을 보면 멤버별로 개성을 맘껏 뽐낼 수 있는 여건이 부럽다”면서 “그래도 우리 때는 하모니 위주로 쫙쫙 뻗는 멋진 노래를 늘 라이브로 했고 가사에도 철학이 있어 좋았다”고 웃었다. 고양=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14일 오후, 19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등을 대히트시킨 초기 걸그룹 이시스터즈 멤버 김희선 씨(71)를 경기 고양시의 자택에서 만났다. 최근 한국 걸그룹 역사를 집대성한 전시에 갔다가 오랜만에 깊은 감회에 젖었다는 그는 뇌성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로 활동하는 딸 정유선 씨(42)에게 들려줄 얘기가 있다고 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편지글로 정리했다. 》
유선아, 엄마야.

요즘처럼 눈부신 계절이면 1970년의 그 찬란했던 봄이 생각 나. 첫아들 낳은 지 4년 만에 가진 소중한 우리 딸 유선이. 42년이 흘렀구나. 1970년 4월 12일. 네가 세상에 태어난 날. 한번 긴 얘기를 해주고 싶었어. 매일 미국에 있는 너와 인터넷 전화를 걸어도 못다 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

그날 네 우렁찬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도 소리죽여 울었는데 눈물이 마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그때까지 몰랐지. 갈수록 핏기 없이 노래지던 너의 얼굴. 생후 9일 만에 황달로 입원했고, 한 달 만에 ‘원인불명’이란 말만 듣고 널 집에 데려와야 했어. 병원을 수십 군데 다녔을까. 1973년 어느 날이었을 거야. “원인을 알 수 없다” “발육이 늦으니 기다려보라”는 말만 듣다가 찾아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기다린 건 ‘신생아 황달로 인한 뇌성마비’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이었어.

많이 울었어.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게 어떤 건지도 알게 됐어. 병원에서는 “언어치료, 물리치료를 받으려면 하루빨리 재활원에 보내라”고 했지만. 넌 알지 몰라. 재활원 문 앞에서 도저히 널 떼어놓을 자신이 없어 되돌아왔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단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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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울릉도 트위스트’로 날렸었지

그때까지만 해도 엄만 가수였어. 1962년 데뷔한 이시스터즈. 그 얘길 좀 해볼까. “엄마가 왕년에 노래 좀 했다”는 건 너도 알겠지만 자세히 들려준 적은 없었지.

1961년, 고교를 졸업한 엄마는 꿈 많은 소녀였단다. 나도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자는 생각에 신문 구인란을 열심히 들여다봤지. 그러던 어느 날, 신문 한 모퉁이의 1단짜리 모집공고가 눈을 붙잡았어. ‘미8군 전속 가수 모집.’

1964년 ‘서울의 아가씨’가 수록된 2집 음반 표지에 포즈를 취한 이시스터즈. 왼쪽부터 김천숙, 이정자, 김희선(당시 이름 김명자).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제공
엄마가 그래도 ‘노래짱’이었잖니. 세 살 위의 천숙 이모랑 학생 때부터 노래 대회만 나가면 1등이었어. 자신감에 차서는 혼자 미8군 오디션에 갔어. 그때 만난 분이 작곡가 박선길 선생이야. 그분은 “노래가 좋다. 같이 해보자” 하셨지. 얼마나 설렜던지. 박 선생의 ‘솔로보다 여럿이서 함께하는 게 좋겠다’는 말에 엄마가 뭐라고 했게? “우리 언니도 노래를 꽤 잘한답니다!” 언니 역시 박 선생의 오디션을 통과했어. 박 선생은 “김 시스터즈의 뒤를 잇는 훌륭한 여성 보컬 (그룹)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나랑 동갑인 이정자를 발탁해 트리오를 짰어. 1962년이었을 거야.

이쯤에서 똑똑한 우리 딸이 궁금한 게 있어야 하는데? 멤버 셋 중 둘이 김 씨인데 왜 ‘이’시스터즈일까? 유명한 김시스터즈 언니들이 있었으니까. 언니들 영광을 우리가 잇겠다는 의미에서 마지막 멤버 이정자의 성에서 ‘이’를 따와 지은 거야. 몇 년 후 정자가 나가고 김상미 씨가 새 멤버로 들어왔지. 김 씨만 셋 있는 ‘이시스터즈’라니, 재밌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방송 데뷔도 바로 그 이름 덕에 이뤄진 거야.

1962년, KBS 노래경연이 있었는데 그때 예선을 통과한 여성 그룹이 결선에 못 나오게 됐대. 그 그룹도 ‘이시스터즈’였다지. 골머리 썩던 프로듀서는 노래 잘하고 이름도 같은 우리를 발견하고 ‘유레카(발견했다)!’를 외친 거야. 우린 2등으로 입상했지. 그걸 계기로 미8군에서 벗어나 ‘전국구’가 됐어. ‘신세기레코오드사’랑 계약하고 음반도 녹음하게 된 거야.

그해 12월이었나. 첫 녹음 기억이 생생해. 추운 날이었지. 데뷔 곡인 ‘워싱톤 광장’을 녹음하는데 부츠 신고 머플러 썼어도 그날은 어찌나 더 떨리던지.

셋이서 한번에 동시에 화음을 넣으면서. 한 곡 갖고 밤을 꼴딱 새웠지. 요즘도 그때 녹음한 LP판을 가끔 들어보면 ‘야, 대단했네’ 소리가 절로 나와.

우리는 1960년대를 휩쓸었단다. ‘울릉도 트위스트’ ‘서울의 아가씨’ 같은 곡이 전국에서 울려 퍼졌어. 지금도 유명한 히트곡 ‘울릉도 트위스트’ 녹음할 때 생각이 난다. 작곡가 황우루 선생이 곡을 들고 왔는데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하는 가사가 너무 유치한 거야. “안 부른다”고 했어. 그러다 하릴없이 녹음한 게 요즘 말로 ‘대박’이 난 거야. 트위스트 안무도 누가 짜준 게 아니야. 우리끼리 “이렇게 흔들면 음악이랑 잘 어울리겠다”며 연습했어. 요즘 걸그룹 의상이 야하다고 하지만 그땐 더했어, 얘. 아슬아슬 초미니 스커트 입고 무대에 나가면 늘씬한 다리를 보고 군인들은 소리 지르고 어른들은 혀를 차고 여자들은 질투했지.

○ 박사학위에 손자-손녀까지 안겨준 너

정유선 씨의 가족. 왼쪽부터 남편 장석화씨, 아들 하빈 군, 딸 예빈 양, 정 씨. 정유선 씨 제공
다리 얘길 괜히 꺼냈나. 초등학교 때까지도 네 다리는 고무처럼 휘청댔지. 서너 발짝 가다 넘어지고 넘어져도 유선이는 학교에서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았지. 공부도 잘했던 네가 대입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엄마는 억울한 마음만 삼켰어. “유선이, 너 유학 가볼래?” 했던 건 아빠였지. 이시스터즈를 함께했던 천숙 언니가 1980년경 미국 버지니아 주로 이민 갔었잖니. 넌 겁도 없이 “그래 볼까?” 했지. 한국 생활도 편치 않은 네가 말이야. 널 바다 건너로 보낸 게 1989년이었나.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명의 ‘이 시스터’의 후원도 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무위로 끝났을 거야. 조지메이슨대에서 매년 장학금을 받더니 2004년에 의사소통 보조기기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아냈잖니. 모교에서 교편까지 잡게 됐지. 지난달에 네가 최우수 교수로 뽑혀 상을 받았을 때 엄마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단다.

그래도 가장 뿌듯했던 건 1995년, 네가 “시집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야. 룸메이트의 사촌이어서 가까워졌다는 장 서방은 한눈에도 듬직해보였지. 요즘도 열두 살 손자 하빈이, 아홉 살 손녀 예빈이 목소리를 들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단다.

저번 5일, 엄마는 오랜만에 50년쯤 어려진 기분을 느꼈어. 인천 부평아트센터에서 여는 ‘한국대중음악 걸 그룹사(史): 저고리시스터에서 소녀시대까지-소원을 말해 봐’ 전시에 갔었거든.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 선생이 준비한 그 전시에 이시스터즈의 사진도 걸린다는 얘길 네 아빠가 오려놓은 기사에서 봤었지.

최 선생한테서 들은 걸그룹 역사는 흥미롭더구나. 처음 듣는 얘기도 많았어. 특히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 1939년 나온 저고리시스터였다는 것.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 ‘연락선은 떠난다’의 장세정,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박향림, 민요가수 이화자가 모두 그 멤버였대. 국내 활동 기록은 1940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오케 그랜드 쇼’ 공연 기사에도 등장하지. 1941년생인 엄마가 태어나기도 전이구나.

저고리시스터 멤버 이난영 선생이 자신의 딸과 조카들을 조련해서 만든 그룹이 김시스터즈야. 박진영 양현석 씨보다 60년은 앞섰던 셈이지. 그것도 여성이 그런 기획을 했으니. 김시스터즈는 1950년 6·25전쟁 중 부산으로 피란 가는 미군열차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대. 민간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1959년엔 미국까지 진출했어. ‘찰리 브라운’이라는 곡으로 빌보드 차트에도 올랐지. 뒤를 이은 걸그룹은 1960년 데뷔한 김치켓이었어. ‘검은 상처의 부루스’ 등으로 인기를 얻었지. 이후 ‘새드 무비’를 번안해 부른 정시스터즈, 현미 언니가 속했던 현시스터즈, 윤복희 씨가 속했던 듀엣 투 스쿼럴스와 트리오 코리언 키튼즈도 나왔어. 그 다음이 우리 이시스터즈의 시대였던 거야.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 셋 사진이 눈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날 둘러싸고 카메라 플래시까지 터뜨려대더구나. 그 순간 엄마는 말이야, 50년 전, 스무 살 나의 무대로 돌아온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단다. 예쁜 옷 입고 하늘하늘 노래하던, 내 젊은 시절….

○ 뇌성마비 판정 받던 날 마이크 놓았어

엄마는 너 유선이가 뇌성마비 판정을 받은 1973년 마이크를 놓았어. 하지만 그 덕분에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동화구연가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어. 나가 놀지 못하는 널 위해 동화를 읽어준 게 시작이었지. 1976년 색동회 주최 전국어머니동화구연대회에서 입상한 이후 36년간 ‘동화 읽어주는 아줌마’로 행복했어. 지금도 전국을 돌면서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동화를 읽어주고 있지.

그래, 무대가 한 번도 그립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야. 그래도 그 뒤에 온 인생에는, 진짜 무대가, 아주 넓은 무대가 준비돼 있었어. 유선아, 이해하겠니?

엄마의 무대는 네가 있어서 충분히 아름다웠어.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 기억나니? “유선이보다 하루만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네 예쁜 모습 오래오래 보고 싶어서.” 내 자랑스러운 딸, 고마워. 넌 나의 무대야. 오래도록 지킬 수 있게 건강해줘.

유선아, 사랑한다.

고양=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이시스터즈#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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