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의 구두수선공 “내가 서울대 최고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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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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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내 구두수선소 56년째 운영 하용진씨

56년째 서울대 내에서 구두 수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서울대 최고참’ 하용진 씨가 손님이 맡긴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56년째 서울대 내에서 구두 수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서울대 최고참’ 하용진 씨가 손님이 맡긴 구두를 수선하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내가 서울대 최고참이여, 나보다 오래된 사람 여기 없어.”

총장도, 명예교수도 제치고 ‘서울대 최고참’이라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 사무실은 서울대 학생회관 뒤편에 붙어 있는 6.6m²(2평) 남짓한 골방이다. 펜 대신 망치와 펜치를 들고, 강의 대신 학생들의 구두를 어루만진다. 56년째 서울대에서 구두 수선소를 운영하고 있는 하용진 할아버지 이야기다.

팔순인 하 씨는 올해 구두 수선소를 그만둔다.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관계자는 “할아버지께서 올해 말까지만 하기로 했다”고 최근 밝혔다.

16일 오후 수선소는 방학인데도 끊임없이 학생들이 찾아왔다. 닳은 굽을 빼내고 새 굽을 끼워 넣기만 하면 금세 끝나지만 일일이 손으로 크기가 맞는 굽을 깎아 붙여주기도 한다.

처음 수선소를 열 때부터 쓴 망치는 손잡이가 반질반질 까맣게 윤이 났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할아버지는 전쟁 직후부터 이 수선소를 운영했다. 60년 가까이 손님 응대를 한 할아버지는 “신발을 보면 주인 성격까지 알 수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손을 많이 다쳐 한 달간 쉰 것 외에는 일을 거른 적이 없다. 매일 평일 오전 8시 반, 토요일 오전 10시에 문을 열었다. 결혼해 집을 사고 다섯 아들을 키우는 동안 일터 바로 곁에서는 1960년 4·19혁명,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시위만 하면 학생들이 우리 가게 앞에 가방을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달려 나갔어. 꼭 안 찾아가는 가방이 있었는데 어딜 다쳤거나 감옥에 간 학생들 가방이었겠지. 그땐 아무 생각 없이 가게 옮길 때 버렸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 보관해 뒀다 박물관 같은 데 줄걸 그랬어.”

시위가 한창일 때 학생들이 동맹휴학하면 잠시 수선소 문을 닫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면 학생들이 하 씨도 서울대생이라고 변호해줘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수선소도 훨씬 붐볐다. 하 씨는 “남대문시장에서 중고 신발을 사와 4년 내내 고쳐 신는 가난한 학생이 많았다”고 말했다.

수선소 단골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그를 기억한다. 하 씨는 “가끔 관공서에 일 보러 가면 높은 자리에 있는 졸업생들이 알아보고 반갑다고들 한다”며 “그럴 때면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했다. 수선소 입구 정면에는 한 미대 졸업생이 그린 수선소 풍경화가 걸려 있다. 지난해 12월 ‘할아버지 수선소에 걸어 놓으면 학교에 내 흔적이 오랫동안 남을 것 같다’며 선물한 것이다.

1975년 관악캠퍼스로 옮겨온 뒤 집도 근처로 이사했지만 하 씨는 아직까지 관악산을 올라본 적이 없다. 아들들은 벌써 몇년 전부터 그만두고 쉬라고 했지만 이 일 관두면 뭐 하나 덜컥 겁이 나 쉽게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하 씨는 인터뷰 말미 한참 동안 두 손을 내려다봤다. 긁히고 파인 자국, 구두약 얼룩이 가득한 손이었다. “이 손이 참 열심히 일한 손이여. 너도 참 고생 많이 혔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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