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는 고구려 계승한 한국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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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교과서의 발해사

한국의 고등학생용 한국사 교과서들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한국 역사라는 사실을 다수의 역사적 사료를 토대로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교과서들에 따르면 7세기 말 당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은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이끌고 지린 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해 발해를 세웠다. 지배층은 주로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은 대부분 말갈인이었다.

발해 2대왕 무왕은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 지역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발해는 당의 산둥지방을 공격하기도 했고 돌궐, 일본 등과 함께 당과 신라를 견제했다. 이어 3대 문왕 때부터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당의 문물을 받아들였다.

무왕 때 ‘인안’, 문왕 때 ‘대흥’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해 중국과의 대등한 지위를 과시했다. 9세기 전반 선왕 때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지배하고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해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바다 건너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뜻이었으니 당시 발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10세기 초에 들어와 국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고려 때 기록인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등에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인이라고 씌어 있다. 727년 발해가 일본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담긴 국서를 보냈고 당시 일본도 발해를 자연스럽게 고구려라고 불렀다. 발해의 지배층에는 대씨와 고구려 왕족인 고씨가 많았다.

문화적으로도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했다는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문왕의 둘째 딸 정혜 공주의 무덤 양식은 고구려식인 굴식 돌방무덤이고, 천장도 고구려 무덤의 독특한 양식인 모 줄임 양식으로 되어 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터를 비롯한 발해 주거지에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난방 장치인 온돌이 발견됐다. 발해의 궁전 터와 사원 터에서 나온 와당 등의 문양이 소박하고 직선적인 것 역시 고구려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발해의 중앙 정치 조직은 당 제도의 영향을 받아 3성 6부를 근간으로 했지만 그 명칭과 운영에서는 독자성을 띠었다. 우선 3성 6부의 명칭이 각각 달랐는데, 특히 당의 6부 이름인 이, 호, 예, 병, 형, 공과 달리 발해는 충인의지예신(忠仁義智禮信)의 유교 윤리를 담아 충부, 인부, 의부, 지부, 예부, 신부라고 썼다. 또 당의 3성이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것과 달리 발해에서는 정당성이 선조성, 중대성보다 상위 기구였고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총리가 되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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