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성 평가절차만 지키면 대출부실 책임 묻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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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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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년 대출병폐 메스 든 김석동

김석동 금융위원장(사진)이 이달 초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사고’를 하나 치려고 한다”고 넌지시 귀띔했다. 그 무렵 ‘중소기업 대출을 늘린다’ ‘중소기업 정책금융기관을 개편한다’는 미확인 보도가 넘쳐나는 것과 관련해 김 위원장은 “그런 방향이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사업성이 별로 없으면서도 대출 받아 땅 짚고 헤엄치는 경영을 해온 중소기업을 도려내는 대신 유망한 기업으로 돈줄의 물꼬를 트려고 한다”며 “중소기업 대출 관행을 뜯어고치는 대수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위원장은 올 1월 취임 이후 줄곧 금융계 및 정치권과 싸웠다. 원래 그의 머릿속에는 ‘저축은행 부실 정리, 가계부채 해결 및 외환시장 건전성 확보, 중소기업 금융대책’이라는 세 가지 과제가 들어 있었다. 부실 저축은행을 처리하는 사이 가계부채는 사상 최대치로 치솟았고 외환시장은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로 요동쳤다. ‘성과를 못 내는 장관’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김 위원장이 구상하는 ‘중기 돈줄 개혁’의 뼈대는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와 작은 위험도 감수하려 하지 않는 심사관행 때문에 연명하는 ‘좀비 중소기업’에 정책자금 대출을 끊고, 젊은 창업자와 유망 회사에 자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중소기업 대출 관행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그는 ‘비올 때 우산 뺏는’ 고질적인 대출 관행을 바꾸기 위해 “‘사업성 평가 절차만 지켰다면 대출 후 부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금융감독규정과 은행 내규에 반영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초 은행인 한성은행이 1897년 설립된 뒤 국내 은행이 금과옥조로 삼아온 담보 및 보증 중심의 대출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혁신적 구상이 오랜 기간 굳어져온 금융관행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기자는 9일 창업을 준비하는 회사원 정태경 씨(38)가 서울 강북의 한 은행에서 대출을 신청하는 현장에 동행했다. 정 씨가 “내년 초 친구들과 음식재료 유통마진을 줄인 새로운 개념의 식당을 열려고 한다”고 하자 은행원의 안색이 굳어졌다. “사업자등록증이 없으면 중소기업 창업자금 대출은 안 됩니다.” ‘창업하려고 대출받는 건데, 사업을 이미 시작했어야 한다고?’ 정 씨의 얼굴이 붉어지자 은행원은 고개를 숙인 채 “이미 상당한 돈을 투자한 상태라야 한다”고 말했다.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대출 관행을 바꾸면 중소기업 연쇄도산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은행에 부실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감독규정은 나중에 금융부실이 커지면 배임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 금융위의 이런 방침이 알려지면 한나라당과 청와대에서 반발할 개연성이 높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표를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협의했느냐는 질문에 김 위원장은 “권한 내에서 책임을 다하라고 위원장을 시킨 것 아닌가.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지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외롭고 도발적인 실험에 금융권의 시선이 쏠려 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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