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 美외교전문 25만건 공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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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측, 美에 “김경준 송환 미뤄달라” 요청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2007년 10월 5일 본국에 보고한 외교전문 내용이 올려져 있는 위키리크스 홈페이지. 이 전문에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은퇴 공연’으로 묘사돼 있다. 위키리크스 홈페이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2007년 10월 5일 본국에 보고한 외교전문 내용이 올려져 있는 위키리크스 홈페이지. 이 전문에는 2차 남북 정상회담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은퇴 공연’으로 묘사돼 있다. 위키리크스 홈페이지
폭로 전문 웹사이트 위키리크스가 미국 외교전문 25만1287건을 2일 모두 공개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수차례에 걸쳐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을 통해 전문 2만여 건을 공개하면서 신분 보호를 위해 주요 발언자의 이름을 가렸던 위키리크스는 이번에는 모든 전문을 그대로 인터넷에 게재했다. 한반도 관련 전문은 약 1만4000여 건이고, 이 가운데 주한 미국대사관이 작성한 문건은 2000건이다. 주한 미대사관 문건은 멀리는 1988년 작성된 것부터 지난해 문건까지 망라돼 있다.

▽ 김정일, “MB 대북정책을 왜 외교부가”=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9년 8월 1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만나 “전 정권에서 북측을 담당하던 통일부가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교부에 주도권(driver’s seat)을 뺏겼다”며 “이명박 정권에서 통일부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현 회장이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같은 달 25일 가진 조찬 대화를 바탕으로 주미 대사관이 작성한 전문에 있는 내용이다. 현 회장이 스티븐스 대사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이는 김 위원장의 발언 가운데는 “중국을 믿지 않는다” “미국이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아리랑 공연 가운데 미사일 발사 장면을 없애도록 했다” “아리랑 공연 중 군인들이 대거 등장하는 장면을 한국이 싫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공연에 학생들을 많이 포함시켰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 MB진영, 대선 전 BBK 김경준 송환 연기 요청=대통령 선거를 두 달여 앞둔 2007년 10월 25일 한나라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은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대사를 만나 ‘BBK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인물인 김경준 씨의 한국 송환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 유 전 장관은 이명박 후보가 전문적인 사기사건의 피해자이며, 김 씨의 한국 송환은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칠 ‘폭발적 이슈’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이 김 씨를 대선 기간에 송환하면 내정간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약 일주일 뒤인 31일 버시바우 대사는 유 전 장관을 다시 만나 “미국이 2005년 12월 김 씨의 송환을 이미 승인했고, 그가 거부하지 않아 송환을 연기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 이명박, “박근혜는 유머감각 없어”=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인 2006년 3월 7일 버시바우 당시 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쟁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거론하며 “박 후보가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어 유머 감각이 없다”며 “박 대표에 대한 지지는 그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들로부터의 지지”라고 말했다.

이 시장은 또 미군 장갑차 사건 후 노무현 당시 후보가 2002년 대선에서 어떻게 반미감정을 불붙였는지를 상기시키면서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비슷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버시바우 대사에게 경고했다.

▽ 박근혜 만난 김정일, “우리는 모두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2년 5월 방북한 박근혜 전 대표에게 “우리는 모두 위대한 지도자의 자녀이니 선친들(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우리들에게 달려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함께 일할 것을 약속하자”고 제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박 전 대표는 2008년 11월 6일 주한 미대사관저에서 스티븐스 대사와 오찬을 하면서 김 위원장과의 대화를 소개했다.

▽ 버시바우,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은퇴공연”=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인 ‘10·4선언’이 발표되자 버시바우 당시 대사는 “선언(10·4선언)을 노무현 대통령의 ‘은퇴공연(swan song)’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버시바우 대사는 또 “노 대통령이 김정일의 눈을 마주 보며 ‘북한 핵 프로그램이 종식돼야 한다’고 말할 준비가 돼 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 2006년 북한 미사일 발사 후 한미 마찰=북한이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직후인 2006년 7월 5일 주한 미대사관 외교전문에 따르면 한미 양측은 같은 달 11일로 예정됐던 남북 장관급회담 개최 여부를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회담을 예정대로 하겠다는 한국 측과 달리 버시바우 당시 대사는 “북한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business as usual)’ 대응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며 회담 연기를 촉구했다. 남북 장관급회담은 예정대로 7월 11일 열렸다. 전문은 “평소 침착하고 정중한 반기문 (외교부) 장관이 국무회의에서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 한국이 미국 문제 해결사?=2010년 2월 11일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과 동석한 한나라당 강석호 의원은 스티븐스 대사에게 ‘이 대통령과 이슬람 카리모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리면 미국의 우즈베크 영공 사용 여부를 타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강 의원이 어떤 경로로 이런 얘기를 들었는지 등은 거론되지 않았다. 주한 미대사관은 며칠 뒤 별도의 전문에서 한-우즈베크 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영공 사용 문제가 일절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 일본, 독도 문제 미국 태도에 불만=주일 미국대사관의 2006년 7월 3일자 전문에 따르면 일본 외무성의 사사에 겐이치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한국과 일본의 독도 갈등과 관련해 미국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는 데 강한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미국 정부가 나서서 한국을 설득해 독도 주변 해양조사를 단념토록 할 것을 요청했다. 2006년 4월 18일자 전문에는 일본 외무성이 라종일 주일 대사에게 한국이 국제수로기구(IHO) 해저지명소위원회(SCUFN)에 동해 해저지명 등재 신청을 포기하면 일본이 독도 주변 수로측량 계획을 중단하겠다는 비밀 제안을 했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 ‘위키’와 공조했던 매체들 “여과없는 공개는 위험” ▼

위키리크스의 미국 외교전문 공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의 유력 매체들은 한목소리로 비판했고 한국 외교통상부도 우려를 나타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미국 뉴욕타임스, 독일의 슈피겔, 프랑스 르몽드, 스페인 엘파이스 등 5개 매체는 가디언 웹사이트를 통해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위키리크스를 비난했다. 이 매체들은 “그동안 우리는 철저한 편집과정을 거친 문서만 공개하겠다는 분명한 원칙에 따라 위키리크스와 협력했다”며 “하지만 편집하지 않은 채 미 국무부 외교전문을 공개한 결정을 개탄한다. 이는 정보 제공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의 빌 켈러 편집국장은 “관심을 끌려고 하는지, ‘투명성’이라는 절대 원칙을 고수하는지 아니면 다른 악의가 있는지 판단할 수 없지만 위키리크스가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을 결정했다는 것이 슬프다”고 말했다.

위키리크스는 지난해 11월부터 미국 외교전문을 차례차례 공개하면서 정보 제공자의 이름을 지우는 작업을 가디언 등의 매체와 함께 해왔다.

한국 외교부도 외교 당국 간에 나눈 민감한 대화가 당사자의 실명까지 포함돼 공개되면서 외교관의 신변노출 위험과 외교활동 위축을 우려했다. 2010년 1월 14일자로 주한 미국대사관이 국무부로 발송한 전문의 경우 위키리크스가 이전에 발표한 전문에는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의 오찬 상대가 ‘××××××××××××’로 돼 있으나 이번에 공개된 전문에는 위성락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 실명이 드러났다.

이번 공개된 전문에 여러 차례 이름이 거론된 한 고위 당국자는 “평소 외교관끼리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대화내용도 전문으로 옮겨놓고 제3자가 보게 되면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무단으로 외교정보를 공개하는 행위는 외교활동 위축은 물론이고 당사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범죄행위”라며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전문이어서 한국으로서는 마땅히 내놓을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donga.com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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