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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YS 대선막바지에 SOS…3000억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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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YS 대선막바지에 SOS…3000억 지원했다”

동아일보입력 2011-08-10 09:41수정 2015-05-27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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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 측에 선거자금으로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9일 출간한 `노태우 회고록'(상ㆍ하권)에서 "199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양대 선거를 맞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면서 정치자금, 북방외교를 비롯한 6공화국의 비화를 내보였다.

특히 대선 비자금을 상세히 공개하면서 "비자금으로 파생된 일들로 함께 일한 많은 사람과 국민에게 걱정과 실망을 안겨준 데 자괴할 따름"이라며 "내가 마지막 사람이었기를 진실로 바란다"고 썼다.

◇"대선자금 87년엔 2000억, 92년엔 3000억원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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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은 "당시 민자당의 김영삼 대통령 후보가 1992년 5월 민자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뒤 `(대선에서) 적어도 4000억~5000억원이 들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해왔고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이원조 전 의원을 통해 각각 1000억원을 지원했다"고 전했다.

이어 "대선 막바지에 김 후보로부터 자금이 모자란다는 SOS(긴급요청)를 받고 금 전 장관을 통해 한몫에 1000억원을 보내줬다"며 "김 후보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감사인사를 했다"고 밝혔다.

1987년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선거자금으로 1400억원을 지원받았고 당 재정위원ㆍ후원회 등에서 모은 500억원을 더해 2000억원 정도 선거자금을 사용했다고 공개했다.

그는 "나의 재임 시까지 여당의 정치자금은 대부분 대기업으로부터 충당했다"며"기업들은 정부의 국책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얻은 이익을 상당 부분 정치자금으로 내놨고 정권 측에서는 이 자금을 정치 또는 통치에 필요한 여러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서울올림픽 이후 기업인들 면담 신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면담이 끝날 때쯤 그들은 `통치자금에 써달라'며 봉투를 내놓곤 했고 기업인이 자리를 뜨면 바로 이현우 경호실장을 불러 봉투를 넘겨줬다"고 말했다.

그는 청와대 금고에 대해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장으로 떠나기 전 그 금고에 100억원 이상을 넣어뒀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건 당시 자신이 관리한 금액이 "이자를 제외하면 현금 1218억원, 기업주에 대한 채권 1539억원으로 원금만 2757억원이었다"며 "대선에서 모두 사용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큰 돈이 남았다"고 밝혔다. 또 "모은 돈은 훗날 유용하게 쓰자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北, 남북정상회담 제의했으나 거절"

노 전 대통령은 북방외교와 얽힌 비화도 공개했다.

그는 한ㆍ중 수교 과정에서 "중국 측이 `북한에 사전 통보하지 않을 테니 한국도 어느 나라에도 (수교 협상을) 알리지 말라'고 강력히 요청해 대만에 알리지 못했다"면서 "그 결과 대만이 수교 단절 등의 조치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1992년 봄 윤기복 조평통 위원장이 김일성의 특사로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며 "하지만 초청 시기가 김일성 생일과 맞물려 있었고, 당시 박철언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거절했다"고 소개했다.

한반도 핵(核) 문제에 대해서는 "1988년 취임 직후 릴리 주한 미 대사와 메네트리 미8군 사령관으로부터 `대한민국에 (미군) 전술핵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언론에서 핵무기가 여러 군데 배치된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제로는 한 곳뿐이었다."라고 밝혔다.

이후 1991년 가을 `미국이 전 세계에 배치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한국에서도 철수할 것 같다'는 정보보고를 받았고,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도록 주도권을 잡겠다는 생각에 그해 11월8일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발표했다고 회고했다.

노 전 대통령은 12·12사태와 6·29선언 등 주요 정치적 사건의 뒷얘기도 공개했다.

그는 "12·12 사태는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과 관련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려다 일어난 돌발 사고였다"며 "쿠데타가 성립될 구성요건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쿠데타로 규정한다면 구성 요건인 사전계획이 있었어야 하는데 수사계획 이외의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10·26 사태 직후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신군부가 모인 30경비단을 포위했다"며 "나는 자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30경비단에 들어온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고 우리는 `기회는 이때'라고 판단해 군을 출동시키기로 했다"고 말했다.

1987년 6·29 선언에 대해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처음에는 단임으로 물러난다는 생각이었지만 임기 후반으로 가면서 달라졌고 결국은 자신이 결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전 전 대통령이 대통령을 그만두되 물러난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면서 1986년 3월부터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다고 밝혔다.

그는 "직선제 개헌 시위가 피크에 이르렀던 87년 6월10일 당일 직선제 개헌 수용을 결심했다"며 이를 위한 기초작업에 들어간 게 18일이었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은 24일이 돼서야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여도 이기지 않겠느냐"고 물었고 왔다갔다 하는 전 전 대통령의 생각을 굳혀놓기 위해 "어렵지 않겠습니까?"라고 반어법을 쓴게 나중에 자신이 직선제에 반대한 것으로 오해를 사게 됐다고 말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유언비어가 진범"이라며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는 등 유언비어를 듣고 시민이 무기고를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7 계엄 확대 결정에 대해 "사람의 심리는 새벽 2~3시경 가장 약해지기에 이 시각을 기해 서울 주요 대학에 병력을 출동시켰고 예상대로 저항은 거의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비롯한 주요 정치권 인사들에 대해 개인적인 평가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선 "수없는 난경을 겪어오면서 얻은 경험이 몸에 배어 있었고 관찰력이 예리했다"며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총명함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김 총재가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마저 일었다"고 회고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년간 매주 만나다시피 했고 내 옆에서 국가 경영을 봐오기는 했지만 진지한 면보다는 피상적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권력을 향해 하나에서 열까지 투쟁하는 자세가 변함없이 엿보였다. 그의 취임연설에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6공화국의 민주성마저 부인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종필 전 총리는 30년 가까이 국정에 몸담아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믿음직스럽게 여겨졌다"고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활동적 인물이었고 우정과 동지애가 유난히 강했지만 우정을 국가보다 상위에 놓을 수는 없었다"며 "인식의 차이로 해서 전임자인 나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면서 서운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미안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털어놨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해선 1978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년가족 식사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이 날밤 1개를 집어 큰 영애(근혜)에게 주었는데 근혜양이 받지 않았고 미묘한 분위기가 흐르자 옆에 있던 근영양이 '아버지, 저 주세요'라며 받아 입에 넣었다"며 "그 장면을 보면서 박 대통령이 참 외롭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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