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읽기]<24>사랑과 결혼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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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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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연인에게, 결혼은 ‘미친 짓’일까?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이제 5월이다. 사실 5월은 결혼 청첩장을 받아들면서 시작된 지 오래다. 어김없이 올해도 많은 선남선녀가 지금까지 애타게 기다려온 사랑의 결실을 보려 한다. 고궁에서 웨딩 촬영을 하면서 행복에 젖어 있는 젊은 커플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앞으로 겪게 될 수많은 시련을 떠올리면 마냥 미소만을 짓고 있을 수도 없다.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으로 유명한 시인 유하는 영화감독이 되면서 영화 한 편을 우리에게 내놓은 일이 있다. 2002년 개봉된 ‘결혼은 미친 짓이다’다. 이 영화를 통해 유하는 젊은 커플들이 상상하는 결혼생활과 실제로 진행되는 결혼생활 사이에 어느 정도의 간극이 있는지를 예리하고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사랑=결혼’이란 공식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하가 던지는 공식 ‘사랑≠결혼’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선언했다고 할지라도 유하가 사랑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사정은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결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랑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선언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에게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의미, 즉 ‘결혼은 사랑을 질식시킨다’는 의미였던 셈이다.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왜 결혼을 통해서 시들어진다는 것일까? 사랑은 스피노자(1632∼1677)의 정의처럼 ‘외부 대상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만나서 우리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을 곁에 두려고 한다. 그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은 내게 머물 수도 있고 혹은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다. 자유의 철학자 사르트르(1905∼1980)가 이 대목을 놓칠 리 없다.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져야만 한다. (…)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존재와 무(L'^Etre et le N´eant)’☆
사르트르는 사랑에 빠진 자의 불가능한 소망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자는 상대방이 자신을 자유롭게 선택해주기를 원한다. 만약 부모의 강제로 혹은 불가피한 이유로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이 경우 나의 기쁨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어떤 외적인 강제도 없이 철저하게 자유 의지로 상대방이 나를 애인으로 선택하였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시에 상대방이 나를 버릴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받는 자가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애인으로 선택한 뒤 상대방은 일체의 다른 선택, 예를 들면 나를 떠나야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가능한 소망이지만 또 얼마나 절절한 소망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려는 이유는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떠날 수도 있는 자유를 가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에게 지금처럼 기쁨과 행복을 안겨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이제 유하가 왜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이야기했는지 분명해진다. 결혼은 직·간접적으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는 제도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남편이나 혹은 나의 아내라는 일종의 소유관계를 공적으로 인증 받으려고 한다. 이런 소유관계는 나는 어느 집안의 며느리이거나 아니면 사위가 되는 소속 관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결혼은 최종적으로는 사랑의 감정마저도 식어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사랑의 감정은 두 사람이 자유를 가진 것에 비례해 커지는 법이다. 사랑이 최고의 기쁨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언제인가? 언제든지 나를 떠날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상대방이 내 곁에 머무는 순간일 것이다. 반면 상대방이 여러 이유로 나를 떠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놀랍게도 사랑이 수반하는 설렘과 기쁨은 급속도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나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우리는 더는 상대방의 속내를 읽거나 그에게 기쁨을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잊지 말자. 사랑의 열정과 기쁨은 오직 상대방이 언제든지 나를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 설레는 마음으로 결혼식 날짜를 기다리는 연인들은 사랑에 대해 더 깊게 숙고해야만 한다. 축복받은 결혼식이 두 사람의 자유를 제약하고 마침내 사랑의 열정을 싸늘하게 식혀버리는 저주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사랑의 열정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연애시절보다 더 강하게 자신과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얼마나 힘든 일인가. 자유를 구속하는 결혼생활의 관습적 경향성을 거스르며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는 것은 연애시절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는 것보다 더 많은 성숙과 노력을 요구하는 법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사랑에 대한 충실성을 이야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랑의 만남의 영향 아래 내가 그 만남에 실질적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내 상황에 ‘머무는’ 나 자신의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윤리학(L'´ethique)’

사랑은 인간을 성숙시키는 감정이다. 사랑은 기존의 가족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적인 삶을 꿈꾸도록 하며, 동시에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질 때 지금까지 고분고분했던 아이도 부모의 명령에 저항하게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사랑을 체험할 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인간이 모두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배우도록 해주는 살아있는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랑의 만남에 충실하려면’ 우리는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고 지켜주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바뀌어야만’, 다시 말해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자유를 긍정하는 성숙한 인격체로 거듭나야만 한다.

사랑이란 기쁨과 자유라는 두 개념으로 규정되는 감정이다. 연애시절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웠다. 당연히 사랑의 기쁨은 너무나 쉽게 확보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혼생활은 우리의 자유를 일정 정도 제약하게 된다. 자유가 없다면 사랑도 그에 수반되는 설렘과 기쁨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하 감독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결혼생활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지키고 싶은가? 연애시절 우리가 경험했던 사랑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처음 손을 내밀며 프러포즈할 때, 상대방이 떨리던 당신 손을 잡았을 때 당신은 얼마나 행복했는가! 바로 이것이다. 연애시절이나 신혼시절에 상대방이 식사를 차려주거나 혹은 무거운 짐을 들어주었을 때 느꼈던 희열을 항상 기억하라.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나 혹은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남편이 자신의 곁을 떠날 수도 있었지만 떠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결혼은 반드시 미친 짓만은 아닐 수도 있다.

<강신주 철학자·‘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 삶을 만나다’ 저자>

::존재와 무(L'^Etre et le N´eant)☆::
사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던 사르트르의 주저다. 여기서 ‘존재(^Etre)’가 의자, 책상, 컴퓨터 같은 사물을 가리킨다면 ‘무(N´eant)’는 항상 새롭게 자신을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인간을 가리킨다. 사물들이 주어진 본질에 입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은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본질이 있다고 자유를 포기하는 순간, 인간은 ‘무’가 아니라 ‘존재’로 강등되고 만다. 이처럼 사르트르의 ‘무’는 ‘인간에게는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것, 즉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는 개념이었다.

::알랭 바디우(74)☆☆::
이성과 체계에 비판적이었던 현대철학의 경향과는 달리 체계와 진리를 추구했던 현대 프랑스 철학자다. 들뢰즈 이후 가장 주목받는 현대 철학자인 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칸토어(1845∼1918)의 집합론, 마르크스의 혁명이론, 하이데거의 철학을 수용하면서 자신의 사유를 확장시킨다. 철학의 무용론이 팽배한 지금, 바디우는 철학이란 다양한 진리 공정들이 만들어낸 진리들을 소통할 수 있도록 통일된 개념적 공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 저서로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 ‘세계의 논리(Logiques des monde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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