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영화 ‘위험한 상견례’의 가식적인 영호남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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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3일 1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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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상견례 제작보고회.
위험한 상견례 제작보고회.

'지역갈등' 코미디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영화 '위험한 상견례'가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다.

11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위험한 상견례'는 8일부터 10일까지 4월 둘째 주말 동안 45만2196명의 관객을 동원해 2주 연속 흥행 1위 자리를 지켰다. 3월 31일 개봉한 이 영화의 누적관객은 137만4249명이다.

이 정도 히트라면 당연히 축배를 들어 마땅하다. 그러나 '위험한 상견례'의 경우는 불행히도 그렇지가 못하다. '위험한 상견례'는 개봉 전부터 업계의 부단한 관심을 모았던 영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컨셉트가 충무로에서 회자되기 시작할 때부터다.

'위험한 상견례'는 간만에 노이즈 마케팅이 가능한 컨셉트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고질적 문제인 영호남 지역갈등을 소재로 삼아 개봉 전부터도 기대와 우려가 교차됐다.

그러면서 영화가 개봉되면 포털사이트 등을 통해 인터넷 여론이 갑론을박하며 '심형래 노이즈' 이상의 화젯거리로 등극할지 모른다는 예상이 제기됐다. 몇몇 영화전문 블로그에서는 '1000만 관객'을 내다보기까지 했다. 최근 몇 년 간 이 정도 노이즈 영화가 실체화된 적이 있느냐는 주장이었다.

이런 기대가 있었기에 '위험한 상견례'의 2주차 누적관객 137만4249명은 다소 시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대 기대치였던 1000만에는 근처도 못 가고 초 대박 라인인 500만 선에도 당연히 못 미치리라는 예상이다.

잘 해야 300만, 대부분 200~250만 사이를 바라본다. 쪽박은 분명 아니지만 김칫국을 너무 많이 들이켜 밥맛이 떨어졌다.

이처럼 '개봉 전 기대'와 '개봉 후 양상'이 크게 벌어진 이유는 뭘까. 단순하다. 기대했던 만큼 노이즈가 거세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노이즈는커녕 먼지바람 한 번 안 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 흥행세는 탄력을 얻지 못했고, 오직 송새벽과 이시영의 스타 퍼포먼스에만 미디어의 관심과 대중 반응이 집중됐다.

왜 그토록 기대했던 노이즈가 일지 않았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도 단순하다. '위험한 상견례'는 '모두가 기대했던' 형식의 지역갈등 코미디로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정확히 말해 지역갈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코미디로 나왔다.

'위험한 상견례'의 구성과 진행은 단순하다. 호남 출신 남성이 영남 출신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에 호남에 지독한 편견을 지닌 여성의 가족과 만나 승낙부터 받아내야 한다. 그래서 남성은 '서울 강남 출신'으로 신분을 속여 부산을 찾아가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펼쳐지는 좌충우돌 신분위장 코미디의 전형이다.

단순하지만, 충분히 지역 간 갈등구조를 다채롭고 재치 있게 풀어낼 수 있는 플롯이었다. 그런데 영화는 일단 시작지점부터 한 발 뒤로 물러선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대 후반으로 설정된다. 아무런 이유도 없다.

심지어 1980년대 후반 특유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소도구 설정조차도 미비하다. 롤러장, 종이비누 등 갖가지 1980년대 소도구들을 한껏 선보였던 2002년 작 '품행제로'와 비교한다면, '위험한 상견례'는 그야말로 '자막만 1980년대'에 가깝다.

왜 이런 배경설정이 행해진 걸까. 이유는 쉽게 추론된다. 그게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지역갈등은 '옛날 옛적'에나 있었던 것이고, 지금은 그런 갈등을 회고하며 '안타깝던 그 시절'을 반성적으로 고찰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단적으로 말해서 이런 식의 스탠스는 위선적이다. 지역갈등은 지금도 뚜렷이 존재한다.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역기반이 다른 정당 간 갈등을 다룬 정치기사에는 100%, 심지어 야구 같은 스포츠기사에도 종종 지역갈등 조장 댓글들이 등장한다.

한 마디로 '위험한 상견례'는 '바로 지금' 존재하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함으로써 당연히 일 수 있었던 노이즈를 '알아서' 피해간 것이다.

시작부터 이런 식인데, 그 뒤라고 다른 게 있을 리 없다. 기본적으로 '위험한 상견례'는 영남과 호남 간 '차이'를 인정하려 들지를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속 영남인과 호남인은 '말투'만 서로 다르다. 그 기질이나 행동양식, 사고패턴의 차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말투만 바꿔 놓으면 영화 속 호남인들은 그대로 영남인이, 영남인은 호남인이 된다. 그러니 극중 '전라도 꿈'을 꿨다고 주장한 현준(송새벽 분)에게 영남아버지인 영광(백윤식 분)이 "악몽이었군"이라고 정의 내리자 현준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도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예, 그 사투리 하며…" 이쯤 되면 이미 지역갈등이 아니라 '사투리 갈등'이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 속 영호남 갈등의 뿌리는 어디인 걸까. 그냥 '서로의 사투리가 싫어서'일까. 그런 건 아니다. 그런데 차라리 '서로의 사투리가 싫어서'가 더 설득력을 얻는다. 극중 영호남 아버지들에게는 지극히 개인사적인 과거 갈등이 놓여있다. 그걸 갖고 서로가 서로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그게 지역편견으로 자리 잡았다는 식이다.

이런 건 사실 지역갈등 코드에 넣을 것도 못 된다. 지역갈등은 지역 간 기질과 성향의 차이에서 나온다. 실질적으로 지역감정을 지닌 영호남인들 중 상대 지역인과 '악연'을 겪은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계속해서 기질과 성향은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고, 과거의 개인적 오해에서 모든 것이 비롯됐다고만 주장한다. 이러니 '위험한 상견례' 속 지역갈등이란 적어도 한국사회의 지역갈등을 '대변'할만한 설정에선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로 이런 문제들이야말로 '위험한 상견례'가 정작 주장하고 싶었던 '주제'일 수 있다. 영남과 호남은 서로 다른 말투를 제외하곤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모두 똑같은 사람들, 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판박이' 같은 사람들인데 과거의 오해나 말썽 탓에 화합을 못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우리는 모두가 한민족, 한겨레고, 나아가 세계도 모두가 하나다. 한 마디로 위 아 더 월드다.

이런 코미디를 미국에선 '로빈 윌리엄스식 코미디'라 부른다. '굿모닝 베트남' '미세스 다웃파이어' '패치 아담스' '제이콥의 거짓말' 등 일련의 로빈 윌리엄스 코미디들을 지켜봐온 관객들이라면 어떤 의미인지 금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첨예한 갈등을 놓고 더 이상 단순화시킬 수 없을 때까지 단순화시켜 놓은 뒤, 이제 손톱만 해진 갈등을 주인공이 간단하게 손가락 하나로 해결해버리는 코미디. 그 이후엔 '이렇게 쉬운 일을 왜 해결하지 못 하는가'라며 세상을 타박하는 인본주의 코미디다.

물론 그 사이 애초 영화가 설정한 갈등은 이미 그 본질이 휘발된 채 왜곡돼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로빈 윌리엄스식 코미디'라는 호칭은 폄하의 의미다.

'위험한 상견례'와 같은 접근법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그래봤자 코미디'인데 뭘 그리 골치 아프게 현실을 반영해야만 하느냐는 입장이다.

코미디는 본래 각박한 현실을 잊기 위해 보는 것인데, 거기에 첨예한 현실을 들이댄다면 오히려 코미디로서의 기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마디로 '한 예술 하려고 코미디하느냐'는 비판이다.


또 다른 입장은, 그런 식의 접근이 지역갈등을 오히려 고조시킬 수 있다는 우려다. 사실 이런 식의 우려가 상당히 클 것이다. 결국 지역갈등 고조시켜 장사나 해먹자고 하는 태도는 오히려 반사회적이며 반인륜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누이 좋고 매부 좋게 가자는 태도, 지역갈등 따위 아예 인정치 않는 태도가 더 긍정적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틀린 얘기라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정확한 반론 사례가 존재한다. 지역갈등 또는 지역차이를 놓고, 단순하지만 신랄한 시각을 통해 이를 코미디로서 풀어낸 히트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2002년 10월부터 2004년 2월까지 KBS2 '개그콘서트'를 통해 선보인 코너 '생활사투리'다. 박중현, 정종철, 김시덕, 이재훈 등 '개그콘서트' 2기 주요멤버들이 총출동한 '생활사투리'는 방영 당시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

"당신을 사랑합니다"가 경상도 사투리로 "내 아를 낳아도"라 외친 부분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언급된다. 그밖에 "당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는 전라도에서 "존겅께 챙겨" 경상도에선 "오다 줏었다", "입술이 참 아름답습니다"는 전라도에서 "후끈 달아오르는구마잉~" 경상도에선 "쥐 잡아문나" 등 전설적인 '사투리 버전'이 많다.

'생활사투리' 속 사투리 묘사는 단순히 언어습관의 차이만을 짚은 것이 아니었다. 영호남 간 '기질'의 차이를 짚은 것이었다. 나아가 정서, 판단, 습성의 차이까지도 짚었다. 어떤 의미에선 한국 대중문화계 역사상 가장 노골적으로 '지역차이'를 짚은 코너에 속했다.

그러나 '생활사투리'를 통해 영호남 갈등이 심화됐다는 얘긴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물론 다분히 과장된 묘사여서 일정부분 노이즈가 일긴 했어도, 갈등을 심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영남인과 호남인 간 서로 다른 특성에 대해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는 미디어 분석이 많았다.

특히 언급한 "내 아를 낳아도"의 경우 영남인들까지도 파안대소하며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영화 '해운대'에서 설경구의 대사로 등장하기도 했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서 지역화합이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굳이 지역갈등 코미디를 의도했다면, 멀쩡히 현존하는 갈등을 두고 '없다'고 우겨댄다거나, '모두가 다 똑같다' 내지는 '옛날 옛적 일일 뿐'라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보다, 오히려 '다름'에 대한 묘사부터 정확히 짚어 해결점을 찾아내는 방식이 필요했다는 것.

또한 '그래봤자 코미디일 뿐'이라는 입장이더라도, 모든 종류의 코미디는 실재하는 현실을 정확히 기반에 두고 실행돼야 최적의 효과를 낸다는 건 그 옛날 마당극 시절부터 '원론'에 속한다.

모든 종류의 인종과 취향의 용광로 미국도 이 같은 '원론'에서 크게 비껴가질 않는다. 마땅히 존재하는 '다름'의 문제를 두고 '무조건 덮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름'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주력한다.

예컨대 동성애자를 다룰 시 무조건 '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성애자들보다 예술과 문화에 정통하며 섬세한 미적 센스를 지닌 민감한 이들로 묘사하는 식이다.

"내 아를 낳아도"가 지극히 마초적이지만 동시에 책임감 있는 남성상을 드러냈던 것처럼, "존겅께 챙겨"가 유들유들하지만 곰살 맞고 따스한 남성상을 드러냈던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사회적 갈등 상황에 대한 대중문화계의 접근은, 희한하게도 보다 자유로울 듯 여겨지는 영화 장르보다 TV, 그 중에서도 TV 코미디 프로그램 쪽이 늘 한발 앞서왔다.

예는 많다. 영화 장르에서 사회 권력층을 '대놓고' 비판한 첫 케이스는 김호선 감독의 1988년작 '서울무지개' 정도로 지목되고 있다. 1987년 대선 이후 확 풀린 검열기준 덕택에 가능했다.

그런데 TV 코미디 프로그램은 정권이 바뀌기 전부터도 이런 시도를 해왔다. 1986년부터 시작된 KBS2 '유머1번지'의 정치풍자 코너,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이 대표적이다. 1988년에는 그보다 더 노골적인 최양락의 '네로25시'가 가동되고 있었다. 영화는 오히려 '뒷북'이었던 셈이다.

KBS2 '유머1번지'의 정치풍자 코너,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KBS2 '유머1번지'의 정치풍자 코너, 김형곤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

왜 이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첨예한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민간자본이 만들어내는 영화보다 공영방송의 코미디 프로그램이 더 도발적이고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건, 해외기준으로 '그것이야말로 코미디'다.

어쩌면 영화와 TV라는 미디어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는 계층과 TV를 보는 계층의 차이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5분짜리 개그 꼭지와 2시간짜리 영화의 분량 차이 탓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단순히 '인력'의 차이 탓으로 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분명한 건 하나다. '위험한 상견례'는 적어도 올해 등장한 영화들 중에선 그 컨셉트와 실행 사이 가장 큰 실망감을 안겨준 영화라는 점이다. 해태 껌 안파는 부산 슈퍼 정도 아이디어나 쥐고서 다루기에, 지역갈등은 훨씬 더 많은 함유와 예리한 메스를 들이댔어야 더 웃기고, 더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었던 화두였다.

노이즈가 일더라도 다분히 건강한 노이즈가 생길 수 있었다. 그만큼 더 큰 상업적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위험한 상견례'가 이처럼 '무늬만' 지역갈등을 다룬 탓에, 진정으로 날카롭고 재치 있게 현실을 묘사한 지역갈등 코미디가 다시 나오려면 또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 오·감·만·족 O₂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news.donga.com/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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