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신의진]그녀들의 설 땅, 무엇이 앗아가는가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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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8일은 전 세계 여성들의 인권 신장을 촉구하는 여성의 날이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노동 현장에서 억압과 착취를 당하면서도 참정권조차 없어 사회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여성들. 그녀들이 거리로 나와 온갖 저항을 뚫고 결국 남녀평등의 가치를 법과 제도 속에서 보장받은 사건을 기념한 날이다. 일부 남성은 ‘왜 여성의 날은 있고 남성의 날은 없냐’며 역차별적 발상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볼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런 사회는 성평등 의식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가치 역시 합리성이 결여된 특징을 지닌다.

우리 사회에도 정의와 합리성이 결여된 집단에서는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취급과 차별을 가하고 있다. 최근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구태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46대 대한변협회장 선거에서 여성부협회장 내정자였던 이명숙 변호사가 돌연 낙마했다. 대한변협의 신영무 협회장이 선거운동을 함께하며 여성 변호사들의 표를 일구어 승리에 일조한 러닝메이트의 부협회장 지명을 총회 인준 5일 전에 일방적으로 철회한 것이다. 철회와 관련한 정확한 사실 관계나 내부 규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외부인의 시각은 공정성이 부족하다고 할지 모르나 오히려 이해관계가 없으므로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이런 외부인의 눈에 선거 당시 러닝메이트이자 여성부협회장 직책을 맡기로 했던 이 변호사를 큰 실책이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낙마시킨 것은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

대한변협 여성부협회장의 낙마

더구나 이 변호사는 대한변협 인권이사로 2년간 재직하면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했고 최근까지 아동 성폭력 형사사법 절차상 2차 피해에 대한 국가 상대 손해배상소송 등을 이끌어온 여성 인권 분야의 리더급 변호사이다. 이 변호사의 낙마로 인해 대한변협을 통해 그녀가 헌신해왔던 성폭력 피해 어린이 지원 사업, 여성과 소수 약자의 인권 옹호 활동 등이 위축될까 봐 너무 안타깝다.

대한변협의 선거 관련 잡음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차별 문제라기보다는 그 단체의 의사결정 방식, 운영 규칙 등과 관련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반영한다. 사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의견이 무시되는 단체는 항상 정의와 합리성이 결여돼 결국은 탐욕을 자초하여 망하기 마련이다. 이런 단체일수록 오히려 겉으로는 여성을 우대한다면서, 실속이 없는 자리에 할당하여 생색내기에 급급하거나 홍보 효과가 약하다고 생각되면 각종 이유를 들어 쉽게 퇴출시킨다. 억울함을 항변하는 당사자에게는 여자라서 속이 좁아 대의를 위한 결정에 따르지 못한다고 오히려 더 비난한다. 이런 식으로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 여성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대기업과 정부 등 큰 조직의 고위직에 여성의 비율이 턱없이 낮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과 아동은 그 사회의 가장 대표적 약자였다. 따라서 한 사회의 선진화 정도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느 정도인지, 아동들의 복지를 위한 예산이 얼마인지를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통계로는 한국 여성의 취업률이 계속 증가하고, 각종 자격고시에서 여성의 도약이 두드러지는 등 예전에 비하면 성차별이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한국 여성 개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일과 자녀 양육에 쩔쩔매는 ‘슈퍼맘’이 넘쳐나고, 정리해고의 1순위도 여성들이다. 같은 능력을 가진 남성 동료들에 비해 승진의 기회도 아직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자신의 일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일부 여성은 아예 출산과 가정생활을 포기하여 저출산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이다. 남녀 차별을 폐지하겠다는 시끄러운 구호보다는 사회의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합리적인 가치를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힘이 약하다고 해서, 소수라고 해서 존중받지 못하고 목소리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남녀평등이란 가치는 설 자리가 없다.

성차별 줄었지만 아직 숙제도 많아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인류는 그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경제적, 문화적 번영을 이루어 왔다. 남녀평등이란 가치는 남자와 여자의 권리가 같아진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훨씬 더 크고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초래했다. 여성들이 사회 속에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들이 추구해 왔던 가치, 그녀들 특유의 능력들이 인류 사회 발전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었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땅에 아직도 이러한 소중한 가치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합리성이 결여된 많은 단체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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