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김영나’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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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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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고 재밌어야 박물관… 아이들 자주 찾고 감동 느끼게 할 것”

“특정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전시, 미술사를 흔들어 놓고 새롭게 구성한 전시를 꾸며보고 싶습니다.” 김영나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새롭고 입체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표정은 밝았으나 그의 생각에선 무게가 느껴졌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특정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전시, 미술사를 흔들어 놓고 새롭게 구성한 전시를 꾸며보고 싶습니다.” 김영나 신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새롭고 입체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표정은 밝았으나 그의 생각에선 무게가 느껴졌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네? ‘리’(언니 김리나)가 아니라 ‘영’(동생 김영나)이라고요? 혹시 바뀐 것 아닙니까?”

“아니, 국립중앙박물관장? 오히려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더 어울리는 자리 아닌가요?”

8일 오전 김영나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60)가 국립중앙박물관장에 내정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문화재 박물관 관련 인사들은 대부분 놀라움과 함께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서양미술사 전공자가 고고학과 고미술 중심의 국립중앙박물관 수장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외라는 반응도 잠시, 관심사는 ‘첫 부녀(父女) 국립중앙박물관장의 탄생’으로 옮겨갔다. 김 관장은 1945년부터 1970년까지 초대 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1909∼1990)의 막내딸이다. 김 관장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레 미술사를 전공하게 됐다. 그의 큰언니는 국내의 대표적 불교미술사학자인 김리나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명예교수(69). 미술사 가족인 셈이다.

취임 다음 날인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김 관장을 만났다. 박물관 전시실 1층 중앙홀 ‘역사의 길’을 함께 걸었다. 기자는 김 관장과의 개인적인 인연 얘기를 먼저 꺼냈다. “대학 다닐 때 관장님의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때 학점 어떻게 나왔죠?”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그 얘기부터 꺼냈는데 예상치 않게 정곡을 찔렸다. “아…, 그럭저럭 나온 것 같은데요. 그때 김리나 선생님은 동양미술사를 강의하셨고 관장님은 서양미술사를 강의하셨죠.”

관장으로 취임한 지 이틀 동안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대학에 있으면 지금은 방학인데, 박물관장이 되니 출근을 해야 한다는 점. 이게 눈에 띄는 차이인 것 같네요.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는 점도 달라진 것이고. 지금은 업무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서양미술, 현대미술 전공자가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장인가’라는 세간의 의문을 김 관장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03년 서울대 박물관장이 될 때, 서양미술사 전공인 제가 고고학이 강한 서울대 박물관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2년 해보니 할 수 있더군요. 15년 동안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하면서 한국미술사나 고고학 분야의 연구 동향, 연구자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습니다. 전통과 현대는 별개가 아니지요. 서양미술 전공자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여할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의 관심사는 ‘첫 부녀 박물관장 탄생’이다. 아버지인 김재원 초대 관장에 대한 추억을 물었다.

“1980년이었죠.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친척들이 ‘부모님 덕분에 공부 잘 마쳤구나’, 이러시더군요. 그때 저는 속으로 ‘아니,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 받았는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철이 들면서 아버님 덕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게 됐습니다.”

아버지인 김 초대 관장이 김 관장에게 미친 영향, 아버지의 존재 의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선 언니에게 ‘한국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없으니 한국미술사를 공부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 대신 저는 막내여서 자유로웠지요. 그러나 저 역시 아버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하신 아버님은 독일 미술관 관련 책을 많이 수집하고 읽으셨습니다. 렘브란트와 뒤러를 특히 좋아하셨지요. 저의 미국 유학 시절에 아버님은 ‘유럽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느 도시에 있는 어느 미술관은 어떤 특징이 있고, 어느 미술관에 가면 근처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자야 한다’, 이런 정보까지 꼼꼼하게 챙겨 주셨습니다. 실제로 그 호텔에 갔다가 숙박비가 두 배로 올라 당황한 적도 있습니다만(웃음). 또 아버님은 ‘근현대 서양미술을 전공한다고 해도 문화재 관련 유적도 꼭 가봐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한번은 이탈리아 남자는 위험하다며 이탈리아 여행에 따라 오신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의 도움으로 유럽 여행과 답사를 다녔는데 그게 바로 ‘진짜’ 미술사 공부였습니다.”

김 관장은 박물관 운영에 있어 △어린이들의 박물관 관람문화 정착 △새로운 시각의 전시를 특히 강조했다. 그는 취임사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박물관에 자주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계획이 궁금했다.

“많은 어린이가 박물관에 오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체로 와서 그냥 쓱 보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만 전시실 안에 들여보내 놓고 인솔 선생님은 그냥 밖에서 서성이는 경우도 있지요. 외국에선 유물 하나를 놓고 차근차근 설명하기도 하고 이모저모 물어보기도 하죠. 이런 시간이 많아져야 합니다. 하나를 봐도 제대로 보고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국보 금동반가사유상이 왜 우리나라의 대표적 미술품으로 평가받는지, 사유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점 등을 박물관에서 느끼고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에 또 오고 싶은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감동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 그는 “소외지역의 어린이들, 아직도 제대로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 주민들을 중앙박물관으로 초대해 전통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느낄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의 전시에 대해서도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아시아의 박물관은 대체로 보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대표화가인 김홍도 특별전 등과 같은 전시를 많이 합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미술사를 새롭게 보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그런 전시를 해보고 싶습니다. 너무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미술사를 흔들어 놓고 다시 구성해보는 그런 전시 말입니다. 해외 박물관 미술관은 이런 시도를 많이 합니다. 시대순으로 유물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없애는 것이죠. 미국에서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었을 때, 콜럼버스와 신대륙을 뛰어넘어 당시 중국이나 이슬람권 등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전시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전시의 경우는 국경을 없앤 것이었죠.”

기존과 다른 문맥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전시를 꾸며보겠다는 말이다. 그 생각은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시대를 개막한 이래 그동안의 성과를 토대로 좀 더 성숙한 박물관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선 준비 기간이 충분해야 합니다. 전시를 하기 전에 심포지엄을 열고 그 논의 성과를 전시에 반영할 수도 있겠지요. 박물관의 큐레이터와 학자들이 모여 전시를 미리 논하고 토론 성과를 바탕으로 전시 실무작업을 진행하면 전시가 훨씬 풍요로워질 겁니다.”

미술사학자로서 서양과 한국의 미술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는지 물었다.

“미술사학자가 되면 모두 다 좋아하게 됩니다. 하지만 피카소 공부를 오래 했으니 피카소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대학원 다닐 때 석굴암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미술입니다. 불교미술이지만 어느 시대에 봐도 감동을 주는 작품이지요.”

미술사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인문학 가운데 하나다. 그는 미술사의 매력을 “참으로 자료가 많다는 것”이라고 했다. “예술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그들의 작품을 늘 새롭게 해석할 수 있지요. 피카소도 매번 달리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주변에서 “소녀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김 관장. 인터뷰 내내 그의 표정은 밝고 편안했다. “50대 초반으로만 생각했는데 올해 환갑이라니 놀랐다”고 말을 건네자 “관장 되는 바람에 나이가 다 들통났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차관급 정무직으로 정해진 임기는 없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김 관장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관람객은 쉬면서 감동받고 작가들은 영감을 얻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박물관은 편안하면서도 재미있는 일이 참 많은 곳입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김영나 관장 ::

―경기여고 및 美뮬런버그대 미술과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 및 박사
―덕성여대 교수
―서울대 박물관장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휴직)
―문화재위원회 근대문화재분과위원(현)
―저서 ‘서양현대미술의 기원’ ‘조형과 시대정신’ ‘20세기 한국 미술’ 등
▼ 11대까지 여성 2명… 명망 있는 고고학자-미술사학자가 ‘단골’ ▼

■ 국립중앙박물관 역대 관장



9일 취임한 김영나 관장은 11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초대 관장은 김 관장의 아버지인 김재원 박사. 일제강점기에 독일 뮌헨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박물관장 자리를 맡았다. 한국 박물관의 초석을 다지고 6·25전쟁의 와중에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

2대 김원용 관장(1922∼1993)은 고고학자 겸 미술사학자였다. 1962∼1987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3대 황수영 관장(1918∼2011)은 불교미술에 집중한 미술사학자였다. 개성 출신인 그는 최순우 4대 중앙박물관장, 진홍섭 전 이화여대 교수와 함께 ‘문화재 개성 삼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순우 관장(1916∼1984)은 스테디셀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하다. 쉽고 편안한 문체로 한국미의 깊이를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5대 한병삼 관장(1935∼2001)은 정통 고고학자로서 박물관장 자리에 올랐다. 6대 정양모 관장(77)은 한국 도자사연구의 권위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였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아들이다. 7대 지건길 관장은 공주 무령왕릉, 경주 천마총 등을 발굴한 고고학자. 지금은 문화재위원으로 발굴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건무 8대 관장은 청동기 전공 고고학자다. 문화재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난주 차관급 인사 때 물러났다. 역사학자 이병도 선생의 손자이자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의 동생이다. 3월에 용인대 교수로 복귀한다.

첫 여성 국립중앙박물관장인 9대 김홍남 관장은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사학자인 10대 최광식 관장은 고고학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은 첫 관장이었다. 지난주 문화재청장으로 임명됐다. 이건무 전 청장에 이어 중앙박물관장에서 문화재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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