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獨 ‘1kg 표준정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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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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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93.6mm 실리콘 공이냐… 전기력을 중력으로 환산한 저울이냐

122년 만에 질량의 정의가 바뀔 수 있을까.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 공동연구진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1kg짜리 실리콘 공(왼쪽)을 만들어 그 안에 있는 원자수를 세어 이를 질량의 정의로 삼자고 주장한다. 반면 미국 등은 와트 저울을 이용해 플랑크 상수로 1kg을 정의하려고 한다. 사진 제공 NIST·PTB
122년 만에 질량의 정의가 바뀔 수 있을까.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 공동연구진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1kg짜리 실리콘 공(왼쪽)을 만들어 그 안에 있는 원자수를 세어 이를 질량의 정의로 삼자고 주장한다. 반면 미국 등은 와트 저울을 이용해 플랑크 상수로 1kg을 정의하려고 한다. 사진 제공 NIST·PTB
“만약 우주에서 날아온 운석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국제도량형국(BIPM)을 덮쳐 원기(原器)가 불타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질량 정의가 사라지는 겁니다. 아르헨티나는 원기를 도둑맞기도 했고요.”

최인묵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질량의 정의를 바꿔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재 1kg은 지름과 높이가 각각 39mm인 원기둥으로 정의한다. 원기둥의 재료는 백금(90%)과 이리듐(10%)이다. 이 원기둥은 1889년 국제 원기로 지정된 뒤 국제도량형국의 삼중 금고 안에 꼭꼭 숨겨져 보관됐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국은 영국 귀금속 제련업체인 존슨매티에서 ‘쌍둥이’ 원기를 특별 주문 제작해 질량 표준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천재지변, 도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원기의 질량이 변한다는 것이다. 최 연구원은 “100년간 원기의 질량이 50μg(100만분의 1g) 줄었다”고 말했다. 1kg의 기준이 바뀌면 질량이 관련된 전류, 물질량, 광도의 정의도 덩달아 바뀐다. 예를 들어 물질량의 단위인 1mol(몰)은 ‘탄소 12g 안의 원자 수와 동일한 물질량’으로 정의한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몸무게가 지금보다 늘어날 수도 있다. 최근 미국과 독일은 내년에 있을 질량 표준 정의를 앞두고 치열한 ‘kg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국의 방식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 아보가드로 프로젝트 vs 와트 저울

우리가 쓰는 국제단위계(SI)는 질량(kg·킬로그램), 시간(s·초), 길이(m·미터), 전류(A·암페어), 온도(K·켈빈), 물질량(mol·몰), 광도(cd·칸델라) 등 7개다. 질량을 제외한 6개 단위는 물리적 현상으로 정의하고 있어 표준이 바뀔 염려가 없다. 가령 1m는 ‘진공에서 빛이 2억9979만2458분의 1초 동안 이동한 길이’다. 이에 비해 질량은 122년째 원기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독일이 중심이 된 호주 일본 이탈리아 등 국제 공동연구진은 실리콘으로 지름 93.6mm인 1kg짜리 완벽한 공을 만들어 그 안에 있는 원자 수를 세어 이를 질량 표준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일명 ‘아보가드로 프로젝트(Avogadro Project)’다.

반면에 미국 스위스 프랑스 캐나다 등은 ‘와트 저울(Watt balance)’법을 들고 나왔다. 와트 저울은 간단히 말해 전기력을 중력으로 환산하는 저울이다. 저울 한쪽에 전류가 흐르는 코일을 놓은 뒤 코일에서 발생하는 전기력과 동일한 중력을 갖는 물체를 저울의 다른 한쪽에 놓아 물체의 질량을 계산한다. 와트 저울 방법에 따르면 1kg은 ‘플랑크 상수가 정확히 6.62606896×10-34kgm2/s가 되게 하는 질량’으로 정의된다.

○ 한국 “독창적 와트저울 설계 계획”

프랑스 파리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된 원기. 지름과 높이가 각각 39mm인 원기둥 모양으로 백금과 이리듐을 섞어 제작했다. 사진 제공 국제도량형국
프랑스 파리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된 원기. 지름과 높이가 각각 39mm인 원기둥 모양으로 백금과 이리듐을 섞어 제작했다. 사진 제공 국제도량형국
양측의 전쟁은 지난달 19일 과학학술지 ‘네이처’가 독일 연방물리기술연구소(PTB) 피터 베커 박사 등 아보가드로 프로젝트 팀이 아보가드로수를 지금까지 가장 정확하게 구했다고 발표하면서 불붙었다. 이들이 발표한 아보가드로수는 6.02214084×1023mol-1. 이렇게 되면 1kg은 ‘탄소 원자 질량의 6.02214084×1023/0.012배’로 정의해야 한다.

그러자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NIST는 꼭 일주일 뒤인 지난달 26일 홈페이지를 통해 “플랑크 상수를 이용한 kg 정의를 지지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최 연구원은 “와트 저울 방법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에게는 아무리 완벽하다고 해도 실리콘 공은 국제 원기처럼 인공물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불확도(측정값의 불확실한 정도)만 놓고 봤을 때 현재까지 승자는 아보가드로 프로젝트(3.0×10-8)다. NIST는 불확도를 3.6×10-8까지 낮췄다. 하지만 최종 승자는 아직 알 수 없다. 국제도량형국은 불확도를 2.0×10-8 이하로 낮춰야 한다는 기준을 내걸었다. 국제도량형위원회(CIPM) 위원인 정광화 충남대 분석과학기술대학원장은 “내년 10월 국제도량형총회(CGPM)에서 질량 표준에 대한 기본 틀이 잡힐 것”이라면서 “육상 100m 달리기에서 0.01초를 줄여 기록을 경신하듯 총회 전까지 양측은 계속해서 불확도를 줄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도 질량의 국제 표준 확립에 기여하기 위해 9월 태스크포스(TF)를 꾸렸다. TF 팀장인 김진희 나노양자연구단장은 “불확도가 꾸준히 줄고 있는 와트 저울 방법을 선택했다”면서 “미국 스위스 프랑스 등 나라마다 와트 저울을 구현하는 방식이 다른 만큼 장점만 모아 우리만의 독창적인 와트 저울을 설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 단장은 “내년 10월 질량 표준 방식이 결정되더라도 실제 질량 정의가 바뀌기까지 최소 10년은 더 걸릴 것”이라면서 “후발 주자지만 우리나라도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현경 동아사이언스 기자 uneasy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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