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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2부]<7>복간과 함께 대한민국 기초를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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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2부]<7>복간과 함께 대한민국 기초를 닦다

동아닷컴입력 2010-08-16 03:00수정 2010-11-2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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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託治 주창자 그 누구냐…” 일관되게 독립정부 수립 주장
1945년 말 서울 화신백화점 앞에서 벌어진 신탁통치 반대시위. 1946년 1월 2일 좌익진영이 찬탁으로 바꾸면서 남한 사회는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격렬해졌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광복 직후 한반도 전역은 새로운 나라를 앞두고 좌·우익의 정치 공방이 격렬한 혼돈의 시기였다. 양측은 남·북한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대립은 더욱 격심해졌다. 일제강점기 강제 폐간된 지 5년여 만인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에도 당시 혼란스럽던 사회상이 투영돼 있다. 동아일보는 광복 직후 좌익 언론의 주장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내며 대한민국의 토대를 닦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반탁 운동의 전면에 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은 1945년 10월부터 국내에 전해졌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3상회의)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합의되었다는 소식이 그해 12월 30일 보도된 뒤 좌익이나 우익 진영은 일제히 반탁 운동에 나섰다. 또다시 다른 나라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모욕이자 충격이었다.

동아일보는 12월 30일자 ‘와전(瓦全)보다 옥쇄(玉碎)로’라는 사설에서 반탁을 명료하게 밝히며 전국적인 반탁 운동을 촉구했다. “도대체 ‘탁치(託治)’의 주창자는 어느 나라의 그 누구이냐?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어느 나라가 우리에게 불공대천(不共戴天)할 이 치명적 모욕을 던지려 하였느냐?… 탁치정권에 부딪쳐 보자! 빛은 동방에서! 정의의 승리는 필경 우리에게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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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우익과 함께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좌익 진영은 신탁통치가 알려진 사흘 뒤인 1946년 1월 2일 돌연 입장을 바꿨으며 3일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절대지지’를 외치며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남한 전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반탁(우익)과 찬탁(좌익) 진영의 갈등이 격화됐다. 좌익 진영이 돌변한 이유는 정황상 소련의 ‘협조 요청 혹은 권고’ 때문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동아일보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5월 6일 결렬되자 같은 달 11일자 사설 ‘미소공위 결렬’에서 다시 반탁을 강조했다.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장(한국정치 전공)은 “당시 반탁 운동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상식적인 결정이었다”고 말했다.

○ 남한 단독 정부를 지지

이런 상황 속에서 민족 진영의 지도자들은 새 정부 수립에 대한 노선를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자율정부 즉시수립운동’, 김구의 ‘반탁통일운동 강화’, 미군정의 권고에 따른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이 그것이다.

당시 한반도 북쪽에서는 소련 군정의 주도 아래 ‘북한만의 정권’이 출범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소련 군정은 한반도 문제를 논의할 미소공위가 열리기 3개월 전인 1946년 2월 북한 전역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했으며 토지개혁을 단행토록 했다.

남한의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며 처음으로 남한 자율 정부의 수립 의사를 표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지지했다. 김용직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성신여대 교수·정치학)은 “단독정부 수립에 관한 찬반이 무성할 때 동아일보는 군정을 철폐하고 대외적으로 발언권을 갖는 독립정부 수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1948년 2월 3일자 ‘총선거를 단행하라’는 사설에서 남한만의 총선이 불가피한 이유를 천명했다. “통일조선을 거부한 것은 38선을 철막화한 소련이다. 남북요인회담이 가능할진대 미소공위가 두 번이나 실패할 리가 없고 정부수립 전에 양군 철퇴는 혼란을 초래할 뿐이며 폭동화를 꾀하는 공산파 이외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우심해 가는 남한의 민생 도탄은 급속한 정부수립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으매…우리는 이 이상 군정을 원치 않는다.”

○ 좌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주창

일제강점기 통제됐던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광복 직후 미군정이 들어서며 제약을 받지 않았다. 미군이 서울에 진주하기 하루 전인 1945년 9월 8일 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를 모태로 좌익 성향의 ‘조선인민보’가 창간됐다. 이후 3개월여간 ‘해방일보’ ‘신조선보’ 등 10여 개의 신문이 앞다퉈 나왔는데 대부분이 좌익 진영의 주장을 담은 신문이었다.

여운형의 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광복 직후 일제가 남기고 간 인쇄시설을 접수해 대대적인 선전공세를 펼쳤다. 좌익이 출판 인쇄 시설을 대부분 접수함에 따라 우익 진영의 신문들은 인쇄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의 복간이 지연되기도 했다.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하던 조선정판사에서 위조지폐를 대량으로 찍은 사건을 계기로 1946년 5월 18일 해방일보에 발행정지처분을 내렸다. 29일에는 신문과 정기간행물 창간을 허가제로 바꾸었다. 좌익 신문의 파괴 선동과 허위 보도로 인한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언론계에서도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동아일보는 좌익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총선을 이틀 앞둔 1948년 5월 8일 좌익 세력의 방화로 사옥이 불에 타면서 창간 이후 모아둔 자료 사진 등이 대거 소실됐다. 총선일을 포함해 5개월 동안 동아일보는 조선일보 매일신보 한국일보 등에서 신문을 제작해야 했다. 또 동아일보를 필두로 민중일보 현대일보 등 7개 신문사 기자들은 좌익 기자들이 주도하는 기존 조선신문기자회에 대항해 1947년 8월 ‘조선신문기자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강제 폐간 5년-광복 3개월만에 東亞복간 ▼
민족-민주-문화 3대 主旨 재천명… 김구 선생 ‘경세목탁’ 휘호

1945년 12월 1일 발행한 동아일보 복간호 1면. 주간 설의식의 중간사(重刊辭) ‘주지를 선명함’이 영문 번역본과 함께 실렸다. 한복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휘호 ‘경세목탁(警世木鐸)’을 게재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천도(天道) 무심치 않아 이 강토에 해방의 서기(瑞氣)를 베푸시고 성조(聖祖)의 신의(神意) 무궁하시어 이 천민(天民)에게 자유의 활력을 다시 주시니, 이는 오로지 국사(國事)에 순절한 선열의 공덕을 갸륵타 하심이요, 동아에 빛난 십자군의 무훈을 거룩타 하심이라. 세계사적 변국(變局)의 필연적 일면이라 한들 이 하등의 감격이며 이 하등의 홍복(鴻福)인가?”

1945년 12월 1일 동아일보가 다시 세상에 나왔다. 광복 3개월 반, 일제의 억압으로 강제 폐간된 지 5년 4개월이 지나서였다. 주간 설의식은 중간사(重刊辭)로 쓴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함’을 통해 1920년 창간 때 내세웠던 3대 주지를 다시 천명했다.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여기에 현 국면에 처한 우리의 주지를 구체적으로 부연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로 민족 문화의 완성을 돕는다. 둘째로 민주주의에 의한 여론정치를 지지한다. 셋째로 근로대중의 행복을 보장하는 사회정의의 구현을 기약한다. 넷째로 국력의 강약 등에 따른 차별을 초월한 국제민주주의의 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

1면 중앙에는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경세목탁(警世木鐸)’이라 손수 써 보낸 축하 휘호를 게재했다. 맑고 깊은 소리를 울려 세상을 널리 깨치는 목탁과 같은 신문을 만들어 달라는 메시지였다. 김구 주석은 4면에 기고한 글 ‘최대 직능 발휘하라’에서 “과도기의 혼란은 의례히 있는 법이다. 이 과정을 밟아야만 보다 완전한 질서와 단결을 얻을 것”이라고 국민을 격려했다. 동아일보는 2면 칼럼 ‘최고 유일의 정부’, 3면 ‘우리 임시정부 본격적으로 활동’ 기사를 통해 임정 지지 의사를 밝혔다.

미군사령관 존 하지 중장, 민정장관 로런스 시크 준장도 축사를 전했다. 군정장관 아치볼드 아널드 소장은 “동아일보가 조선에 있어서 석일(昔日)의 위대한 영향력을 다시 발휘하리라고 믿는다”고 축하했다. 이승만 박사가 ‘지도 기관 되어라’라는 제목으로 보낸 축사도 1면 하단에 실렸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본보 송진우 사장 1945년 12월 30일 피살 ▼
“반탁” 주장에 찬탁파 추정세력 6명 범행


1945년 12월 30일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 피살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동아일보 자료 사진
1945년 12월 27일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외상(外相)회의에서 광복 조선에 대한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안이 채택됐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통일 조국을 기대했던 조선인들의 실망과 울분은 컸다. 그러나 신탁통치를 두고 좌우익이 찬반으로 갈렸고, 반탁을 주장하는 민족진영 내부에서도 그 방법론을 놓고 의견이 분분해 정국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가운데 그해 12월 30일 새벽 동아일보 송진우 사장이 서울 종로구 원서동 자택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한현우 등 6명이었고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했다. 범행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찬탁파가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송 사장은 3·1운동을 이끈 48인 가운데 한 명으로 활동하다 투옥됐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사장과 중앙학교 교장을 거쳤고 광복 후에는 반탁 입장을 분명히 했다. 동아일보는 31일 광복 후 첫 송년호에서 광복의 기쁨을 맞은 지 5개월도 못 돼 암살된 송 사장을 애도하는 사설 ‘한 기둥을 잃다’를 실었다.

“하수인이 누구인가를 조사할 필요가 없으리라. 암살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따져볼 필요도 없으리라. 다만 민족의 갱생을 위해 진군하는 우리의 도정(道程)에 피를 보았다 그만일 것이다…민족적 정기를 다시 다듬어 권토중래의 진운(進運)을 계속한다면 선생의 죽음은 비보(悲報)가 아니라 경보(警報)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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