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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8·15]<3>김점곤 평화연구원장·前국방부 차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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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8·15]<3>김점곤 평화연구원장·前국방부 차관보

동아일보입력 2010-08-12 03:00수정 2010-08-12 0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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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軍신분으로 中전쟁터에서 맞은 광복
“전쟁 끝났구나” 희열속 죽음의 공포가…
나는 고졸 자격시험에 붙은 뒤 일본 와세다 제1고등학원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최고 대학으로 경성제국대(현 서울대)가 있었지만 큰형님이 일본 총독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에 입학이 쉽지 않았다.

경성제대는 경(京)자를 떼고 성대(城大)라 불렸는데 식민지의 대학이라 하여 일본 본토 등에서 질 높은 교원을 잘 보내지 않던 때였다. 그럼에도 조선 전역에서 인재가 몰리면서 10 대 1이 훨씬 넘는 경쟁률을 유지했다.

큰형님은 반일(反日) 단체에서 활동한 관계로 이른바 예비검속(檢束) 대상자였다. 일제는 특별법을 만들어 일본 왕실 사람이 조선을 방문하거나 만주행 기차를 타고 조선반도를 경유하기만 해도 예비검속 대상자를 감옥에 가뒀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풀어줬다. 잠재적 범죄자를 미리 단속하는 셈이다. 형님이 감옥에 가고 나면 사식을 넣는 데만도 일본인 변호사를 써야 했다. 형님이 감옥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경제적 타격이 컸다.

와세다 제1고등학원을 졸업한 뒤 와세다대 문학부에 진학했다. 1940년대 초, 제2차 세계대전이 점차 절정으로 치닫는 가운데 미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일본에서도 징집의 압력이 높아졌다. 도쿄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가족의 권유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본에서는 식량난이 시작되는 등 전운이 짙게 드리우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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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학도 출정’의 압박이 높아만 갔다. 경찰서장이 직접 다니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전쟁에 자원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독일과 손잡고 미국에 맞선다”는 등 선전전도 치열해졌다. 모병에 응하지 않으면 징집될 것이 분명해졌다.

결국 간부후보생으로 중국에 갔다. 베이징(北京)에서 약 1년 반 동안 특수교육을 받았다. 일본으로서는 중국 안의 전선(戰線)이 확장되면서 짧은 시간에 군대를 증강할 필요성이 있었다. 훈련은 짧지만 강도 높게 진행됐다. 간부후보생 중 조선인은 내가 유일했다. 졸업할 때 1등을 했지만 조선인이라 하여 상을 일본인에게 빼앗겼다. 교육을 받은 뒤 탕산(唐山) 부근에서 소대장을 맡았다.

전쟁은 사람 공간 무기의 싸움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과 일본의 전쟁은 궁극적으로는 일본이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 4억 명에 가까운 중국의 인구와 한없이 넓은 공간을 일본이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마오쩌둥 군과 장제스 군을 다 상대해야만 했다. 이 같은 느낌은 1945년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강해졌다.

군의 단파무전기로 영국 BBC의 뉴델리방송을 들었는데 일본 군함이 가라앉았다는 소식이 나왔다. 먼 전장에서 미군과 영국군을 접해본 일본군 역시 일본군의 기세가 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해 4월에 히틀러가 자살했다. 5월에는 독일이 무조건 항복했다. 전쟁이 끝나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조선에서는 일제가 언론을 강력하게 통제했으므로 일본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애초부터 독일과 이탈리아와 일본의 연합 자체에 회의적이라서 이들의 항복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진 국가의 연합은 젊은 내가 보기에도 무리였다. 연대를 한다면 바다를 통해야만 가능한데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군은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상황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오지에 배치된 전선의 소대에서 라디오로 동료와 함께 일왕의 항복 선언을 들었다. 조선인인 나로서는 일왕의 육성을 통한 항복 연설이 그리 충격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일본인의 충격은 대단해 보였다. 일왕의 항복 선언이 나오던 순간, 소대는 침묵과 정적이 지배했다.

나는 타국을 위해 나선 전쟁 중 일본도 조선도 아닌 중국 땅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갓 스물을 넘긴 나에게 가장 큰 희열이었다. 일단 사령부로 귀대해야 했기에 총신에 검을 끼운 채 소대원과 함께 긴장을 늦추지 않고 30km를 걸었다. 공격하는 적은 없었다.

전쟁의 부담에서 벗어났지만 이내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왔다. 부대 안에 조선사람은 나뿐이었다. 중대장은 쌀과 트럭 등을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고 했다. 하지만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육로는 막혀 있었다. 만주까지는 열차로 갈 수 있었지만 그곳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북한 땅 또한 소련군이 진주한 상태라 위험하다고 했다.

동료들은 혼자 가지 말고 일본을 통해서 고향으로 가라고 권했다. 길은 해로뿐이었지만 일본의 배는 없었다. 미군이 잠수함으로 일본 선박을 거의 대부분 침몰시킨 뒤라 해외에 주둔 중인 100만 병력을 일본 본토로 후송하려면 30년 이상 걸린다는 말이 나돌았다.

몇 개월간 탕산에 계속 머물렀다. ‘한때의 적’이었지만 중국인으로부터 보복은 없었다. 고향에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이대로 여기에서 발이 묶여 생을 마감하는 것은 아닌지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미국이 선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패전국이기는 했지만 일본은 고등 공업국가라서 미국은 일본을 특별히 대우하는 듯 보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일본군은 ‘천황이 내려준 무기’라 하여 총을 소중히 다루며 깨끗이 닦고 기름칠까지 하면서 정성껏 손질했다. 무장 해제를 위해 일본군 부대를 방문한 미군은 이런 모습에 감탄했다.

우리는 나가사키로 가는 배를 탔다.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는 처참했다. 원자폭탄을 만든 미국조차도 폭탄이 터지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잘 몰랐던 듯하다. 철조망으로 ‘경고’ 표시를 해 두고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

다시 열차를 타고 후쿠오카로 향했다. 후쿠오카 역시 상황이 열악하기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군인 출신은 식량을 얻기가 수월했다. ‘귀환증’을 내면 2주일분의 쌀을 줬다. 일반인은 먹을 게 없어 대부분 아사 직전이었다. 한 노파가 일본떡 네댓 개를 놓고 팔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떡 몇 개라도 팔아서 먹을 것을 사려고 거리로 나온 듯했다. 그는 기력이 다한 듯 보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사람은 민단에서 관리했다. 민단 사무실에서 발급한 증명서를 받아야 배를 탈 수 있었다. 변변한 여관이 없이 부둣가 빈 창고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동포들이 기거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입에 풀칠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라 사람들은 막연한 희망으로 고향땅을 바라봤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이 줄을 섰지만 선박이 한정된 상황에서 먼저 타려고 금품을 건네는 등 불미스러운 거래도 적지 않았다.

이런 혼란 가운데 민단을 통한 귀향은 요원해 보였다. 일본군 연락사무소로 발길을 돌렸다. 군의 육군성이 복원성으로 이름을 바꿔 귀환 장병에게 도움을 줬다. “조선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니까 이틀 안에 연락선 가운데 가장 좋은 배편의 가장 좋은 좌석을 마련해 줬다.

부산에 도착했다. 이북을 포함해 전국 각지로 향하는 사람이 열차를 기다렸다. 나는 관리소에 내가 인솔한 장병의 귀가 편의를 부탁했다. 객차만으로는 수송이 불가능해 화물차가 사람을 싣고 오갔는데 질서 유지가 절실했다.

화차 안 짐칸, 창문도 전등도 없이 어두컴컴한 공간에서는 도둑질, 부녀자 희롱 등 험한 일이 적지 않았다. 비명과 싸움소리 역시 끊이지 않았다. 나는 일본군 출신 몇 명과 함께 열차 안의 질서 유지를 맡았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열차 밖으로 던져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열차 안을 정리했다. 광복기의 혼란상은 귀환 열차 안에서부터 생생히 다가왔다.

광주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집을 봐주던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니 폭격을 피해 가족이 화순군 동복의 외가로 피란을 갔다고 했다. 외가에서 부모님과 만났다. 광복 이후에도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는 막내아들을 부모님은 죽었다고 여겼다고 한다. 마을에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잃었던 나라를 찾았지만 중국에서 일본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라가 반으로 갈려 있었다. 제대로 된 지도자를 세우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국내파는 물론이고, 해외파 역시 미국파 중국파로 나뉘었다. 고향 어른들은 내가 경찰 간부가 되기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부엌에서 대파 꺾는 소리만 들려도 총소리로 착각할 정도로 전쟁의 상처는 깊었다.

학도병으로 참전하면서 못다 한 학업을 잇기 위해 광복 이듬해 서울대에 들어갔다. 국가의 방향을 놓고 서울대에서 대논쟁이 벌어졌다. 우익과 좌익으로 나뉘어 남북관계와 민족의 미래, 심지어 새로 구성되는 나라의 국화(國花)를 무엇으로 할지 토론이 벌어졌다. 토론은 치열했지만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국화에 대한 토론에서 내가 진달래를 국화로 하자는 제안을 내놨는데 북한이 먼저 국화로 정하면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고향 어른들이 “독립된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라”고 조언해 책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1946년 5월 육군사관학교 1기로 입교했고 졸업 후 호남지역 공산당 게릴라 소탕 작전에 지휘관으로 투입됐다.

군정시대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었다. 질서만 깨지 않으면 공산주의자라고 해서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북에서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대립이 시작됐다. 군에서도 여순반란사건 이후 군 내부에 대한 이른바 ‘숙군(肅軍)’이 본격화됐다.

이념 대립을 점차 피부로 느꼈다. 대대장으로 있을 때 인사장교가 좌익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수한 장교여서 훈련을 잘 시켰는데 조선공산당 지위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처형되지 않았나 싶다. 1950년 초의 일이었다.

갈등은 남한 내에서 그치지 않았다. 남북의 충돌이 점차 격렬해졌다.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몇 달 뒤 조국은 전란에 휘말렸다. 조국 땅에서, 같은 민족끼리의 비극이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런 갈등과 비극을 극복한 끝에 가능했다. 상처를 이겨낸 영광이다.

구술 정리=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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