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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6>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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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6>시대를 앞서간 이들의 둥지

동아일보입력 2010-08-09 03:00수정 2010-11-2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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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벽초-육당 ‘조선 3대 천재’ 필진, 민족-계몽의식 일깨워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수많은 재사(才士) 지사(志士)들의 집결지이자 배출구였다. 펜으로 뜻을 펼쳐낼 분출구가 많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동아일보는 뜻과 재능을 갖춘 지식인들의 둥지 역할을 했다.

‘조선 3대 천재’로 불린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 육당 최남선은 모두 동아일보의 주요 필진으로 활약했다.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 ‘무정’을 집필한 춘원은 1923년 5월 16일 촉탁기자(객원기자)로 발령받은 뒤 중간에 사직했던 1년 3개월을 빼고 1933년 8월 29일까지 9년간 재직하며 사설과 횡설수설, 소설(13편), 시, 시조, 동화, 수필, 평론, 서평, 기행문, 번역물 등 하루 원고지 70장 이상을 지면에 쏟아냈다.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김동인은 1935년 잡지 ‘삼천리’에 쓴 ‘춘원연구’에서 춘원에 대해 “가장 세력 있는 신문 지상에 가장 많이 쓰기 때문에 가장 넓게 알려졌다”고 평했다.

최초의 대하역사소설로 꼽히는 ‘임꺽정’을 지은 벽초는 1924년 춘원이 ‘민족적 경륜’이란 사설로 필화를 겪으며 동아일보를 떠나 있을 때 주필이자 편집국장으로 동아일보에 입성했다. 1년이 못 되는 재직기간에도 벽초는 동아일보 지면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해 10월 ‘지식은 권력’이라는 모토 아래 학예란이란 칼럼을 신설했다. 1925년 1월부터 ‘학창산화(學窓散話)’라는 제목을 갖게 된 이 코너는 접순(接脣·키스)의 유래, 호열자균의 번식력, 탱고의 역사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박학다식함을 여실히 보여줬다. 1924년 12월엔 춘향전 소설 개작에 2000원이란 당시 최대 액수를 건 현상공모를 실시했고 1925년 1월엔 신춘문예작품 공모를 민간언론 최초로 도입했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육당은 1925년 8월∼1928년 10월 동아일보 촉탁기자로서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수많은 기사와 칼럼, 탐방기를 집필했다. 동아, 조선과 함께 3대 민간지로 꼽히던 시대일보 사장을 그만둔 뒤였다. 1926년 3∼7월 77회를 연재한 ‘단군론’, 그해 7월∼1927년 1월 89회를 연재한 ‘백두산 근참기’, 1928년 6월 10회에 걸쳐 연재한 ‘조선유람가’ 등이 대표적이다. 육당은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한 수많은 민족사 강연회에서 인기 강사로 활약했으며 동아일보를 사직한 뒤에도 역사교양기사를 장기 연재했다. 1928년 8∼12월 72회 연재한 ‘단군과 상황오제’와 1930년 1∼3월 52회 연재한 ‘조선역사강설’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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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외에도 수많은 문인이 동아일보를 거쳐 갔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지은 송아 주요한은 기자를 거쳐 학예부장과 편집국장을 지냈고 소설 ‘운수 좋은 날’로 유명한 빙허 현진건은 사회부장과 학예부장을 거쳤다.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유명한 횡보 염상섭은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다.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발표한 시인 안서 김억, 소설 ‘상록수’의 저자 심훈, ‘국경의 밤’의 시인 파인 김동환, ‘레디메이드 인생’의 백릉 채만식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다.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춘곡 고희동과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청전 이상범은 동아일보 미술기자였다. 창간기자였던 춘곡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사신도에서 영감을 얻어 동아일보 창간호 1면의 웅비하는 용틀임 도안을 그린 주인공이다. 청전은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역이었다. 미술사가이자 복식사연구가였던 이여성도 1930년대 기자와 조사부장으로 근무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돼 사직했다.

한국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기자인 추송 장덕준은 동아일보 창간 주역이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민간신문 허용 소식을 입수해 동아일보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던 추송은 1920년 11월 중국특파원으로 만주 일대의 조선족 학살 현장을 취재 중 의문사했다. 동아-조선을 옮겨가며 손대는 신문을 최고 부수에 올려놔 근대 신문업계 최대 풍운아로 꼽힌 하몽 이상협은 동아일보 초대 편집국장으로 1923년 9월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직접 현지로 달려가 르포기사를 연재했다. 소학교도 못 나왔지만 숱한 특종으로 이름을 날리며 3대 민간지에서 네 차례나 사회부장을 지낸 종석 유광렬, 신극운동에 불을 붙인 ‘토월회’의 창단멤버이자 ‘홍도야 우지마라’로 유명한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극작가인 고범 이서구도 동아일보 창간기자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동아일보에서 활동했다. 창간 당시 논설반 소속이었던 송산 김명식과 박일병은 당시 명망 있는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웅변가였다. 송산이 1921년 6월 3일∼8월 31일 61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는 조선에 처음 공개적으로 소개된 레닌 일대기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하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활동한 박헌영도 1924년 동아일보에서 판매부 서기와 지방부 기자로 활동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조선 첫 女의사 허영숙, 東亞 학예부장 활약 ▼
춘원의 부인… ‘남녀평등’ 설파


“지금까지 남자는 여자에게 대하여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왓다.…그러면 남자는 여자에 대한 우월감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인가 단연히 내어버릴 것인가.”

동아일보 1926년 1월 1일자 기사 ‘부인문제(婦人問題)의 일면(一面), 남자할 일 여자할 일’ 제1회의 한 구절이다. 기사는 “남자나 여자나 지아비나 안해나 딸이나 누이나 오래비나 누구를 불문하고 사람으로 꼭 평등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왜? 그것이 진리이기 때믄에”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남녀는 유별하다’는 유교 관습이 여전히 남아있던 조선사회에 ‘여성과 남성을 포함한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주장을 직접 제기한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은 허영숙(사진).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였던 그는 1925년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임명된, 조선 최초의 신문사 여성 부장이기도 했다.

허영숙은 춘원 이광수의 부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장안의 화제였다. 이광수는 부인 백혜선과 이혼한 뒤 허영숙과 중국 베이징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고, 두 사람은 이광수가 3·1운동으로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뒤인 1921년 5월 결혼했다.

그러나 허영숙은 일찌감치 ‘신여성’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진명소학교, 경기여중을 거쳐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던 허영숙은 1918년 10월 조선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했다. 베이징 도피생활 중에도 의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던 허영숙은 1920년 5월 서울 서대문 인근에서 ‘영혜의원’을 개업했다.

그해 동아일보 5월 10일자에 허영숙은 ‘화류병자(花柳病者)의 혼인(婚姻)을 금(禁)할 일’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화류병, 즉 성병에 걸린 사람은 국가가 법으로 정해 혼인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인을 각 집안의 사적인 일로 보고 성(性) 문제 거론을 금기시하던 당시 조선사회에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사회적 반향을 반영하듯 약 2주 뒤인 26일에는 허영숙의 의견을 비판하는 긴 기고문이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27년까지 학예부장으로 재직하면서 허영숙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려 의학에 관한 기사를 주로 썼다. 1926년 3월 1∼6일 6회에 걸쳐 연재한 ‘가정위생’에서는 ‘어린아이 울 때 어머니의 주의’부터 ‘월경긔에 잇는 따님을 둔 어머니의 주의하실 몃가지’ ‘해산과 위험’ 등 가정에서 필요한 건강상식 전반을 다뤘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 90년된 고정란 ‘횡설수설’ ‘휴지통’ 첫 회부터 일제탄압-세태 맹공격 ▼

1920년 7월 25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횡설수설’ 첫 회(위)와 같은 해 4월 10일 첫 회가 실린 ‘휴지통’. 두 고정란은 첫 회부터 각각 일제의 언론탄압과 고압적인 통치방식을 맹공했으며 이 같은 자세는 일제강점기 내내 계속됐다.
‘한국 신문사상 최고(最古)의 칼럼난’. 만 90세의 나이로 동아일보 오피니언면을 지키고 있는 ‘횡설수설(橫說竪說)’이다. 창간 100호를 기념해 1920년 7월 25일 첫선을 보인 횡설수설은 첫 회부터 일제의 언론탄압에 대한 가시 돋친 도전으로 시작했다. “정리(正理) 직론(直論)이라고 자신해도 신문지를 경찰서로 실어가 언론자유가 잔해도 없이 참혹하게 유린되는 판인데 (…) 횡설수설이 도리어 이러한 곳에 그 가치가 없으라는 법도 없지.”

1926년 가수 윤심덕과 젊은 문사 김우진이 연락선에서 투신자살하자 횡설수설은 ‘그들의 심경도 동정할 점이 없지 않다’고 한 뒤 ‘하지만 삶의 의의와 가치가 결코 연애만이 아니거늘, 중대한 책임을 지닌 조선 청년으로서!’라고 나무랐다. 1940년 8월 11일 폐간호에서는 사뭇 감상적인 문구로 고별사를 대신했다. “벌여놓은 것 거둬들이고, 시작한 것 끝맺는 때라 수심 중에 희망도 오락가락.”

당대의 해학적 사회상이나 서민들의 애환을 전해온 ‘휴지통’은 창간 직후인 1920년 4월 10일 탄생했다. 첫 회에서는 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어를 배우고 있다며 “요보(여보)라는 개소리는 행여나 배우지 말았으면…. 만세라는 말이 어떠한 말인지 궁리하는 것이 제일 긴급한 일이 아닐른지”라고 꼬집었다. 일제 관리들이 조선인들을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현실을 질타한 것이다.

휴지통은 탄생 17일 만에 발매금지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1920년 4월 27일자 휴지통은 조선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수작을 할 때 ‘긴(金)상’이니 ‘사이(崔)상’이니 할 때가 있다며 “우리 고유한 국어, 즉 조선말을 사용치 아니하고 구차히 외국말을 혼용하려 함은 내 집에 육미봉탕 팔진미를 두고 남의 우거지국이 좋다고 빌어먹으려 하는 것과 일반이다”라고 썼다. 일본어를 ‘남의 우거지국’으로 표현하고 조선어를 ‘국어’로 못 박은 데 대해 일제 당국이 발끈해 발매금지 조치를 내린 것이다.

휴지통은 194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폐간과 함께 독자와 작별한 뒤 1945년 12월 1일 복간호와 함께 부활했지만 횡설수설은 1955년 1월 1일에야 다시 등장했다. 부활을 알리는 첫 칼럼부터 예전의 기개는 여전했다. 금력 권력이 판치는 세태에 격분해 한 청년이 손가락을 자른 사건을 언급하며 횡설수설은 “옛날 중국에서 사어(司魚)라는 이가 혼미한 임금을 깨우치기 위해 제 시체까지 내세워 간(諫)했다고 해서 시간(屍諫)이라는 말이 나왔다. 우리 혼탁세태와 사악한 현실이 통골(痛骨)할 노릇”이라고 질타했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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