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싹한 이 소설, 우리 얘기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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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겨냥 장르소설들, 국내 현실서 소재 찾아

용산참사-교육문제 등
정치-사회적 이슈 건드려
독자들도 민감하게 반응

한국 장르소설의 성취도가 최근 몇 년 새 눈부시다. 국내 작가들의 단행본이 대개 4000∼5000부의 안정적인 판매를 기록하고 있고 스타 작가들도 잇따라 등장했다. 초판도 소화하기 힘들어 ‘대여점 소설’로만 여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과다.

장르소설의 계절인 여름을 겨냥해 출간된 작품 중 국내 작가들의 소설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들은 ‘한국작가가 쓴, 잘 쓴 장르소설’에 머무는 게 아니라 외국 작품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장르소설’로 진화하는 중이다.

백상준 씨는 지난달 출간한 소설집 ‘섬 그리고 좀비’ 중 단편 ‘어둠의 맛’에서 용산 참사로 만들어진 좀비를 등장시킨다. 후반부에 이르면 노동력이 달리는 시골의 노인들이 적게 먹고 많이 일하고자 스스로 좀비가 되는 상황이 펼쳐진다. 박희섭 씨의 ‘백악기의 추억’은 컴퓨터 게임을 하던 젊은이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사건을 다룬 추리소설이다. 실생활에서는 아무런 희망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가상공간에서 게임 점수를 획득하는 것으로 잠시나마 위안을 찾는 모습은 요즘 10대, 20대와 다르지 않다.

과학소설(SF) 평론가 박상준 씨는 “최근 우리 작가들이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배경을 적극적으로 소설에 끌어들이고 그것을 풍자하거나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풀고 있는 게 특징”이라고 말한다. 노인들만 남은 농촌의 문제, 탈출구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문제 등 한국적인 소재를 다루는 작가들의 작품이 그렇다는 것이다. 박 씨는 “소재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의 환상성을 실제 문제와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법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작가적 기량이 크게 향상됐다는 의미다.

지난달 나온 김보영 씨의 소설집 ‘진화 신화’에서 단편 ‘0과 1 사이’도 관심을 끈다. 안경에 부착된 홀로그램으로 통화할 수 있는 미래 세상이 배경이지만 입시 교육에 함몰된 청소년 문제는 여전한 핫이슈다. 지구가 빙하로 뒤덮인 미래가 배경인 배미주 씨의 ‘싱커’도 평범한 늦둥이들을 낮은 계급으로 몰아내는 설정을 통해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을 지적한다.

이번 주 나온 김상현 씨의 ‘하이어드’는 우주의 온갖 종족이 사는 행성 ‘어스’가 소설 공간이다. 다양한 우주 종족이 파워게임으로 얽힌 현대 각국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데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 현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종족의 이야기도 다뤄져 무게감이 만만치 않다. 웹진 ‘판타스틱’(www.fantastique.co.kr)의 운영자 최원택 씨는 “외국 장르소설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하게 파악하지 못할 경우 먼 얘기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면서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나 공감할 만한 정서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최근 장르소설의 경향에 우리 독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위기”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장르소설이 순문학과 같은 고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단편의 수준이 높은 반면 호흡이 긴 장편에 대해서는 좀 더 높은 수준이 요구된다. 황금가지출판사의 김준혁 편집장은 “‘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의 경우 2006년 처음 나왔을 때에 비해 다음 주 나오는 제5권의 수준은 아이디어와 작법 모두 외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라면서 “그러나 장편은 이야기성이라는 줄기의 튼실함이 부족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편집장은 “‘장르소설은 ‘원 소스 멀티 유스’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분야인데, 단편보다는 장편의 활용도가 단연 높은 만큼 창작 장편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 국내 장르소설 역사 ▼

‘추리소설’ 원조 김내성 씨
일제강점기부터 활약
SF-판타지물은
인터넷과 함께 성장


국내 장르소설은 분야별로 이력이 다르다. 추리소설의 경우 김내성 작가가 활약했던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으며 1970년대 김성종 작가가 이름을 날렸다. 1980년대에 이상우, 노원, 정건섭 작가가 조명을 받았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답보 상태다. 무협소설은 1960년대 김광주 작가의 ‘정협지(情俠誌)’가 히트했다. 이후 주춤했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좌백, 설봉, 진산 등 무협 작가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SF와 판타지소설은 인터넷과 함께 성장했다. 1990년대 초중반 PC통신에서 활발하게 쓰였으며, 스포츠신문에서도 장르소설을 공모했다. 사이버 공간의 인기를 시장성으로 판단한 출판사들이 이런 소설을 단행본으로 냈다. 이우혁 씨의 ‘퇴마록’이 큰 인기를 끌고 이영도 씨의 ‘드래곤 라자’가 100만 부 넘게 팔렸다. 2000년대 이후 여러 매체에서 장르소설 공모전을 열고 있으며, 인터넷 공간에서도 연재물이 확산되고 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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