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를 통해 본 대한민국 근현대사/1부]<1>민족 신문의 첫발을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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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7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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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끈 민족주의 세력 총집결… 東亞창간으로 결실

중앙학교 3·1운동 핵심역할
독립운동세력, 仁村 보호
언론 교육사업 역할 맡겨
1920년 4월 1일 역사적 창간

동아일보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 1면
《동아일보가 올해 창간 90주년을 맞았다. 동아일보 90년사에는 한민족이 겪은 격동의 근현대사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19년 3·1운동의 독립만세 함성은 1년 뒤 탄생한 동아일보에 그대로 울려 퍼졌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을 이끌었던 선각자들의 민족혼과 자긍심도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좌우 대립의 혼란을 비집고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과정, 이승만과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지킨 국민들의 열망도 동아일보의 지면을 뜨겁게 했다. 1963년 출범한 동아방송은 17년간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한국 방송 저널리즘의 신기원을 이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90년사에 기록된 우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사를 들여다본다.》

동아일보는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전 세계에 독립 열망을 선포한 지 1년 뒤에 그 정신을 이어받아 탄생했다. 전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의 함성에 놀란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내세우며 조선어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했다. 이에 민족주의 중추세력은 민족의 독립 역량을 제고하고자 동아일보 창간사업에 모여들었고 동아일보 지면에 3·1운동의 정신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정신은 설산 장덕수가 쓴 창간사 ‘주지를 선명하노라’에 나타난다. 창간사는 “한일합방 후 십년에 조선민중은 한바탕 악몽을 꾼 듯하다”며 “조선민중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앞길을 이끌어줄 친구를 열망하게 되었다. 이에 동아일보가 태어났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이리요”라고 밝혀 3·1운동으로 외친 독립 열망이 동아일보라는 결과로 태어났음을 명백히 했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국내 민족 세력은 독립운동을 준비한다. 핵심은 (1년 뒤 동아일보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중앙학교 인사들이었다. 12월, 서울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교장 김성수, 학감을 지낸 고하 송진우, 훗날 고려대 초대 총장이 되는 현상윤이 회동했다. 세 사람은 육당 최남선을 통해 최린 등 천도교 측 인사들과 접촉하도록 하고 남강 이승훈에게는 김성수의 자금을 주어 평안도 및 서울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합동을 이끌어내도록 했다.

김성수는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뒤 귀국한 이듬해인 1915년 24세의 나이로 중앙학교를 인수했다. 1917년에는 경성직뉴(織紐)를 인수해 1919년 경방(경성방직) 설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고 2차로 체포된 현상윤 송진우 등 48인에서도 빠졌다. 거사 직전 전북 부안군 줄포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3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3·1운동 주체세력들은 이 운동을 민족 독립까지 지속해야 할 꾸준한 운동으로 보았으며 이 때문에 운동 지속세력의 보호에 큰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2, 4, 6대 국회의원 유홍과 최형련 전 중앙고 교장도 훗날 “송진우 등이 운동 지속을 위해 김성수를 줄포로 내려가도록 강권했다”고 증언했다. ‘대한민국 부통령 인촌 김성수 연구’를 집필한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역사학)는 “김성수를 보호한 전략에 따라 3·1운동의 정신과 목표는 이후 김성수의 언론, 교육, 민족실업 사업으로 역량이 축적된다”고 설명했다.

김성수는 3·1운동 이후 상경해 투옥된 인사들의 옥바라지에 힘쓰는 한편 1920년 당시 경성방직 국민주 공모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도 총독부의 민간신문 허가 방침을 접한 뒤 한민족의 목소리를 낼 기회로 여기고 발행 서류를 알아보았다. 마침 여러 진영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도 민족 신문의 중심이 될 사람으로 김성수를 꼽고 그와 접촉하고 나섰다.

‘평양매일신문’의 한글판 주간을 지냈던 장덕준은 ‘매일신문’의 편집장을 지내다 사표를 낸 이상협, 아사히신문 기자를 지냈던 진학문과 뜻을 모은 뒤 김성수를 찾아 민족 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당시 중앙학교 교장이었던 최두선도 “애국진영, 민족진영에서 (민간신문을) 하나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신문계의 원로 유근도 합류했다.

마침내 1919년 10월 9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문발행 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10여 건의 신문허가 신청이 제출됐지만 동아일보 등 3개지만 1920년 1월 6일자로 허가됐다. 일제는 실업인 단체인 ‘대정(大正)실업친목회’에 조선일보를,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에 시사신문을 허가했다.

민족주의를 내세운 동아일보를 왜 일제가 허가했을까. 당시 고등경찰 과장이었던 시로가미는 “총독에게 ‘신문을 허가함으로써 그들(독립운동세력)의 동정을 낱낱이 알 수 있다. 그들을 모아 놓아야만 유사시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고 후일 동아일보 허가의 전략적 의도를 털어놓았다.

신문 허가가 난 뒤 김성수는 전국을 돌며 동아일보의 창간 취지를 설명하고 주식 인수를 호소했다. 자본금 마련에만 목적을 두지 않고 전국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민족지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김성수는 경방 주식을 모집할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는 독립운동’이라는 점을 들며 유지들을 설득했고 전국에서 78명이 주식을 인수했다. 1월 14일엔 발기인총회를 열어 사장에 박영효, 편집감독에 유근 양기탁 등 주요 인선을 결정했다.

편집을 맡은 주요 간부진은 이후 사시에 해당하는 3대 주지(主旨)를 결정했다. 주지는 △조선민중의 표현기관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 등 3개항이었다. 동아일보는 1926년 사설에서 이를 △민족주의의 표현 △민주주의 △신문화 건설로 요약했다. 창간의 주역들은 당초 3·1운동 1주년인 3월 1일자로 첫 호를 낼 예정이었으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당초 예정한 자본금 100만 원을 70만 원으로 줄여 4월 1일자로 창간했다. 타블로이드 배대판(倍大版)인 전지판 8쪽이었다. 동아일보 90년사의 첫 타종은 그렇게 울렸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편집감독 유근-양기탁… 소설가 기자 염상섭…

당대 수재들 창간 참여


창간 당시 동아일보 직원은 사장 편집감독 주간 이외에 논설반과 편집국 22명, 영업국 17명 등 모두 74명이었다. 편집국에서는 국장 이상협이 27세, 정치부장 진학문이 26세였으며 평기자 중에서도 김정진(32)을 제외한 전원이 20대였던 ‘청년신문’이었다. 동아일보 창간을 맞아 경향 각처에서, 심지어 해외 유학을 마치고 모여든 이들은 한결같이 당대의 수재들이었다.

편집감독 유근은 황성신문, 양기탁은 영국인 베델(배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창간 멤버였다. 창간기자 유광열은 “유근 선생은 겉으로 봐서는 온후한 군자인데 양기탁 선생은 모습부터 강직해 보이고 애국지사인 혁혁한 풍모가 역연했다. 양 선생은 독립운동에 열중하여 신문사에 별로 못 나왔다”고 훗날 회상했다. 이상협은 19세에 매일신문에 입사해 25세 때 편집장을 맡을 정도로 신문 제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24년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옮겼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소설가 횡보 염상섭도 동아일보 창간 기자였다. 1910년대에 영어를 ‘미국인처럼’ 했던 것으로 유명한 김동성 기자도 있었다. 그는 1921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만국기자대회에서 ‘코리아’ 대표석에 앉았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 “총독부 감시하기 좋은 자리” 세종로에 사옥 마련

1926년 준공한 옛 사옥은


1926년 준공한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 당시 지상 3층 건물이었으나 증축을 거쳐 오늘날 5층 규모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6년 준공한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 당시 지상 3층 건물이었으나 증축을 거쳐 오늘날 5층 규모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강점기 민족 언론의 자취를 오늘날 전해주는 대표적 상징물.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 있는 동아일보사 옛 사옥이다. 근대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져 1920년대 고층 업무시설의 전형이었던 이 건물은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됐다.

동아일보가 1920년 창간 당시 사용한 사옥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중앙학교 교사(校舍)를 전용한 것이었다. 새 사옥을 광화문통(현 세종로 사거리)에 세운 데에는 ‘총독부를 감시하기 위해 총독부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인촌 김성수의 뜻이 반영됐다. 1925년 9월 27일 기공식이 열렸으나 반년 뒤인 1926년 3월 5일 동아일보는 두 번째의 무기정간조치라는 타격을 입었다. 정간으로 인한 자금 압박 속에서도 1926년 12월 11일 3층 총면적 1520m²(약 460평)의 새 사옥으로 입주했다. 이날 동아일보 사설은 “사옥의 불편과 싸우는 싸움은 끝이 났지만 정의를 위하여 불의와 싸우고, 자유를 위하여 압박과 싸우고, 진리를 위하여 허위와 싸우고…”라고 결의를 다졌다.

이 사옥은 1963년 동아방송이 개국하면서 지상 5층 건물로 증축했다. 1992년 10월 27일 동아일보 편집국을 비롯한 주요 시설이 서대문구 충정로 신축 사옥으로 이전한 뒤 1994년 일민(一民)문화관으로 명명됐고 1996년 일민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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