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이 존경받는 사회]<5>서후원 중사 아버지의 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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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나라 위해 죽었다는 것만 알아주면 여한 없겠어”

2007년 청와대 만찬
“왜 외면하나” 예정없던 질문
盧 前대통령은 끝까지 침묵

‘6·29’ 기억하는 그날까지
“6·25처럼 국민이 기억하는
그날 기다리며 살겁니다”

1997년 경북 상주시 상산전자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서후원 중사가 상주의 한 컴퓨터학원에서 공부할 때의 모습. 서 중사는 고교 졸업 뒤 대구기능대에 진학해 전산 관련 자격증을 3개나 땄다. 사진 제공 서영석 씨
1997년 경북 상주시 상산전자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서후원 중사가 상주의 한 컴퓨터학원에서 공부할 때의 모습. 서 중사는 고교 졸업 뒤 대구기능대에 진학해 전산 관련 자격증을 3개나 땄다. 사진 제공 서영석 씨
故서후원 중사는
1980년 11월 28일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경북 상주 상산전자고를 거쳐 대구기능대를 다니며 정보기기운용기능사, 전산응용가공산업기사, 수치제어밀링기능사 등 자격증을 3개나 땄다. 2001년 8월 6일 해군 부사관 189기로 입대했다. 평생을 사과 과수원에서 농사만 짓던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기 위해 장기 복무를 신청했다. 입대 전 아버지가 몸져눕자 과수원 농사도 혼자 지었다. 효심이 소문나 고교 졸업 때는 ‘타인에게 모범을 보이는 학생’이라며 상주시장 표창도 대표로 받았다. 부사관으로 첫 월급을 탔을 때는 동생 국원 씨(28)에게 ‘워크맨’을 사줬다. 국원 씨는 “그때 당시 가격으로 20만 원이 넘는 고가였다”며 “장난삼아 갖고 싶다고 말했는데 진짜로 사줄 줄은 몰랐다”고 기억했다. 서 중사는 매달 월급을 부모님께 부쳐드리고 용돈을 타 쓸 정도로 알뜰했다.》

2002년 1월 고 서후원 중사 가족들은 경남 진해시 해군 교육사령부로 면회를 가 당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서 중사를 만났다. 서 중사, 누나 서귀선 씨, 어머니 김정숙 씨,아버지 서영석 씨, 동생 국원 씨(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서 중사의 동생인 국원 씨는 당시 경북 포항 해병대에서 복무하다 휴가를 나왔다. 사진 제공 서영석 씨
2002년 1월 고 서후원 중사 가족들은 경남 진해시 해군 교육사령부로 면회를 가 당시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서 중사를 만났다. 서 중사, 누나 서귀선 씨, 어머니 김정숙 씨,아버지 서영석 씨, 동생 국원 씨(왼쪽부터)가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다. 서 중사의 동생인 국원 씨는 당시 경북 포항 해병대에서 복무하다 휴가를 나왔다. 사진 제공 서영석 씨
“저희에게 죄가 있다면 자식 낳아서 군대에 보낸 거 하납니다. 대통령께서도 아버지로서 저희들 입장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외면하시는지요….”

분위기는 금세 싸늘해졌다. 2007년 5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 가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청와대는 사전에 질문을 받은 뒤 지정된 사람만 발언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 씨(57)는 “대통령께 질문이 있다”며 예정에 없던 말을 했다. 대통령은 끝까지 침묵만 지켰다.

○ 한 방이 가슴을 관통

소백산맥 자락을 따라 구불구불 산길이 이어졌다. 길을 따라 늘어선 과수원에는 따스한 햇살을 받은 하얀 사과꽃이 피었다. 한 과수원 입구에 다다르자 낡은 민가 하나가 보였다.

‘본인 서영석. 처 김정숙. 자 서후원.’ 12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 자택에서 만난 서 씨는 제2연평해전 발생 두 달여 전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을 보여줬다. “후원이 이름이 남아 있는 유일한 등본이오….” 코팅까지 해둔 등본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아들 생각이 날 때마다 닦았기 때문이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 날인 2002년 6월 30일 오전 1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영안실. 서 중사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왼쪽 가슴에 직경 3cm 크기의 상처가 보였다. 다른 곳은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네 형 맞나?” 서 씨는 두 눈을 의심했다. “맞아요. 아부지….” 작은아들 국원 씨(28)가 답했다. 아버지는 눈을 비벼봤다. 틀림없는 아들이었다. 몸을 돌려봤다. 등에도 직경 10cm의 구멍이 있었다. 총탄이 가슴을 관통해 남긴 상처였다. “아이구, 우리 아들이 죽었구나….”

내연사(기관장)였던 서 중사(당시 22세)는 제2연평해전 때 참수리 357호정 기관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M60 기관총이 설치된 거치대로 뛰어가 방아쇠를 당겼다. 정신없이 싸우던 중 적이 발포한 총탄 한 발이 서 중사의 가슴 왼쪽을 관통하면서 서 중사는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거치대 주변에는 마땅한 엄폐물도 없었다.

○ “다들 열중쉬어 한 채 뒷짐만”

2002년 7월 1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 서 씨는 “우리 아들을 이렇게 허름하게 보낼 수는 없소! 대통령, 국무총리는 어디 있는 거요”라고 외치며 영구차를 막아섰다. 해군 관계자가 “예우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만류했다. 서 씨의 오열을 뒤로한 채 영구차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떠났다.

서 씨는 아들을 외면한 대한민국이 지독히도 미웠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고 싶었지만 법을 몰랐다. 여러 시민단체에 전화를 걸어 “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진보적인 변호사단체라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모두들 뒷짐만 지고 있는데 속이 터지더구먼. ‘노력하겠다’ ‘기다리라’는 말은 다 거짓이더라고….” 서 씨의 뺨에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인 김정숙 씨(55)도 “우리를 챙겨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며 서운해했다.

서 중사가 전사하고 3년 동안 서 씨 부부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아들을 잃은 허탈함에 부부는 평생 일궈오던 사과 과수원도 방치했다. 수확량은 3분의 1로 줄었고, 대인기피증도 왔다.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던 서 씨는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지냈다. 부부는 국원 씨와 큰딸 귀선 씨(32)가 결혼해 손자들을 낳은 뒤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밥숟가락 하나 간신히 뜨는 거지. 후원이 명예가 회복되기 전에 달라질 건 없어….”

고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 씨(왼쪽)와 어머니 김정숙 씨가 19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에 있는 사과 과수원에서 열매를 솎아내고 있다. 부부가 몸져누울 때마다 서 중사가 직접 돌보던 그 과수원이다. 의성=원대연 기자
고 서후원 중사의 아버지 서영석 씨(왼쪽)와 어머니 김정숙 씨가 19일 경북 의성군 옥산면에 있는 사과 과수원에서 열매를 솎아내고 있다. 부부가 몸져누울 때마다 서 중사가 직접 돌보던 그 과수원이다. 의성=원대연 기자
○ 모두가 ‘6·29’를 기억하는 그날까지

서 씨 집 안방에는 낡은 잠바가 하나 걸려 있다. 부부는 아침마다 잠바를 보며 아들을 추억한다. “우리 아들이 착한 ‘과외 선생’이었더라고….”

1996년 경북 상주시 상산전자고에 입학한 서 중사는 3년 내내 자취를 했다. 그의 자취방은 ‘공부방’으로 유명했다. 모범생이던 서 중사가 성적이 낮은 친구들을 데려와 공부를 가르친 것. 그때 한 친구의 어머니가 “고맙다”며 서 중사에게 잠바를 선물했다. “영웅? 그까짓 것 필요 없어. 후원이가 마음씨 착한 놈이었다는 거. 그래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거. 이것만 알아주면 여한이 없겠어.” 부부는 모든 국민이 6·25처럼 제2연평해전을 ‘6·29’로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서 씨는 전사자 가족모임에서 총무를 맡아 매년 정기모임을 주선하고 있다. 다른 유가족들이 힘겨워 할 때마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는 각오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아들들의 업적을 알려야 한다”며 북돋우고 있다. “우리도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과수원까지 내팽개칠 만큼 힘들었지만 힘을 더 내야죠. 모두가 ‘6·29’를 기억하는 날까지 두 눈 부릅뜨고 살 겁니다.”

의성=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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