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0>자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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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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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루지 못할 사랑”
윤심덕-김우진 커플 등
집안 압력에 잇단 情死

《“지난 삼일 오후 열한시에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련락선 덕수환이 사일 오전 네 시경에 대마도 엽흘 지날 지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저 자살을 하엿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엿스나 그 종적을 찻지 못하엿스며…”

―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자》
양장을 한 여자의 이름은 윤심덕, 중년 신사의 이름은 김우진이었다. ‘사의 찬미’를 불렀던 당대 최고의 여가수와 근대극의 선구자였던 연극인이 함께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이다. 당대 유명인들의 정사(情死)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세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26년 8월 6∼9일 동아일보에는 두 사람의 사랑에서 자살에 이르는 전말이 4회 연재됐다.

부호의 아들이었던 김우진은 당시 “나는 도뎌히 또다시 그러한 비인간0 생활로 또다시 끌녀 드러갈 수는 업다”고 말할 정도로 집안의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갖가지 스캔들에 시달렸던 윤심덕은 동료 배우에게 “세상의 남자들은 모두 악마갓다 나는 언제던지 한놈은 죽이고 죽는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또 다른 정사사건으로는 평양 출신 기생 강명화와 백만장자의 아들이었던 장병천의 음독자살사건이 있었다. 강명화는 장병천의 애첩이었지만 장병천의 집안에서는 강명화를 요부(妖婦)로 보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강명화도 자신 때문에 장병천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장병천과 함께 온양온천으로 여행을 떠난 강명화는 1923년 6월 12일 쥐약을 먹고 자살한다. 1923년 6월 16일 동아일보는 ‘꼿가튼 몸이 생명을 끈키까지’라는 제목의 기사로 강명화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장병천도 10월 29일 같은 방법으로 목숨을 던졌다. 1923년 10월 30일 동아일보는 “그(강명화)는 애인의 출세를 희망하엿다. 그러나 장벙텬은 역시 한낫의 부랑자엿다”며 장병천이 강명화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자살사건은 이처럼 애정문제, 집안과의 갈등, 혹은 생활고를 비관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1921년 5월 6일 동아일보에는 학비 부족을 비관해 한강에 투신자살한 소년 이동화의 사연이 실렸다. 배움에 목말라 집을 뛰쳐나와 경성에 왔지만 완고한 부모와 조부가 학비를 보태주지 않았던 것. 할아버지는 돈놀이를 할 정도로 넉넉한 형편이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기사는 “돈이 태산가트면 무엇하리요 자긔 손자가 돈이 업서 불가치 치미는 공부를 못하고 자살까지 하게 되엿는대…”라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근대화의 혼란에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적 상황이 겹쳐졌던 만큼 당시 사람들에게 자살은 현실의 문제를 벗어날 쉬운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2007년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4.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를 기록했다. 고용불안 등 경제적인 이유로 자살을 많이 하지만 정신질환 등도 자살률을 높이는 고위험 인자로 드러났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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