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강제폐방 29년…DNA는 살아있다]<중>시대를 선도한 ‘방송 프런티어’ D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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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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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토크쇼… 숱한 ‘국내 1호’ 개척
방송저널리즘 이끈 뉴스프로 ‘소리로 듣는 동아일보’ 명성
김신조 인터뷰 등 특종 줄이어…정치권력에 맞서다 탄압받기도

다채로운 드라마-오락프로 기존틀 깬 다큐-휴먼드라마 첫선
‘여명 80년’ ‘이 사람을!’ 등 히트…“한국방송 수준 향상에 큰 기여”


동아방송은 정치권력에 대한 칼날 같은 비판 보도와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기록되는 선구적 프로그램들로 시대를 선도했다. 동아방송 프로그램은 ‘문화적 충격’을 불렀다. 취재기자들이 생생한 현장을 전달했고 매 시간 진전된 뉴스를 신속히 보도했다. 국내 제1호 디스크자키(DJ)와 논픽션 정치 드라마를 선보였다. 동아방송은 개척자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 방송 저널리즘의 산실


‘뉴스는 여러분의 생활입니다. 동아뉴스는 잠들지 않습니다.’(동아방송 캐치프레이즈)

동아방송은 빠르고 정확한 뉴스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시사 프로그램으로 방송 보도의 새 시대를 열었다. 동아방송은 “신문과 방송의 상호 보완을 통해 보도 사명에 충실하자”고 설립 취지를 밝혔다. ‘소리로 듣는 동아일보’로 불릴 정도였다.

동아방송의 뉴스는 종래의 방송 뉴스와는 질이나 양, 성격이 달랐다. 당시 KBS는 정부 정책 홍보 일색이었고 MBC 등 민영방송은 오락 위주였다. 동아방송은 다른 방송 뉴스처럼 아나운서가 ‘읽는 뉴스’가 아니라 정보와 비판이 있는 ‘보도하는 뉴스’였다. 초대 뉴스실장 고재언 씨(83)는 “보도 내용의 효율적 전달을 위해 현장 녹음을 많이 땄고 문장도 일상어를 썼다”고 회고했다.

동아방송은 개국 후 매일 15회가량 정시 뉴스를 내보냈다. 동아방송이 개국한 지 11일 만에 MBC가 정시뉴스를 시보 전 뉴스로 바꿨고, 동아방송보다 1년 늦게 개국한 RSB는 처음부터 시보 전 뉴스로 출발했다.

동아방송은 다른 방송보다 한발 앞서 현장에 있었다. 1963년 10월 49명이 익사한 경기 여주군 조포나루터 나룻배 전복사건보도 등은 동아방송의 특종이었다. 1964년 전북 진안군 연창금광 낙반사고에선 8일간 갱 속에 갇힌 광원이 파이프를 통해 전하는 육성을 내보냈다.

1968년 1월 북한 무장공비 서울 침투사건 때 생포된 김신조와 단독 인터뷰를 했고, 1970년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 때는 종일 보도 체제에 들어가 ‘뉴스 절대 우선’이라는 동아방송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동아방송은 다양한 포맷의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심층 분석과 해석을 제공했다. 진행자가 주도하는 앵커 시스템도 처음 도입했다. 1964년 봄 ‘귀로 듣는 석간신문’을 표방한 ‘라디오 석간’이 첫 전파를 탔다.

1969년 10월 31일 시작한 30분짜리 뉴스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뉴스 쇼’는 주요 뉴스, 전화 인터뷰, 특파원 코너 등으로 다양하게 엮어 현재와 같은 뉴스 프로그램의 틀을 마련했다. 동아방송은 당시 방송 언론 가운데선 유일하게 권력에 맞선 ‘작은 거인’이었다. 1963년 대통령선거 투표를 마친 뒤 박정희 대통령이 소감을 묻는 동아방송 김남호 아나운서에게 “동아방송은 거짓말 방송 그만하시오”라고 할 정도로 눈엣가시였다. 정권은 1964년 6월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동아방송의 비판적인 논조를 무력화하기 위해 ‘앵무새’ 프로그램 관련 간부 6명을 연행해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보고 듣는 대로 보도한다는 뜻으로 지은 ‘앵무새’를 빌미로 한 방송 탄압이었다. 하지만 5년 뒤 간부 6명은 전원 최종 무죄판결을 받았다.

1975년 5월 유신헌법 비방이나 개정 주장을 금지하는 내용의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 뒤에는 기관원이 수시로 방송국을 드나들었고 기사를 빼고 고치라는 ‘주문’을 서슴지 않았다. ‘DBS리포트’ ‘오늘의 맥박’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뉴스 쇼’가 폐지됐고 ‘라디오 석간’이 축소됐다. 뉴스를 ‘방송의 생명’으로 삼았기에 유신체제에서 겪은 고통은 극심했다. 그러나 동아방송은 폐방 3개월 전까지도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서울 여의도 사옥 스튜디오를 새롭게 단장하고 있었다.

○ 격조와 창의가 넘치는 프로그램

동아방송은 드라마와 교양·오락 프로그램 등 보도 외 영역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존 방송의 틀과 매너리즘을 과감히 깨고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프로그램이 적지 않았다.

TV가 귀했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초에는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대단했다. 동아방송은 당시 주를 이루던 ‘통속 애정극’ 대신 한국 방송 최초의 다큐멘터리 드라마인 ‘여명 80년’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휴먼 드라마 ‘이 사람을!’, 시추에이션 홈드라마인 ‘우리 아빠 최고’ 등으로 드라마 판도를 흔들었다.

깊이 있는 취재와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동아방송의 상징이었다. 동아방송은 ‘여명 80년’에 이어 ‘정계야화’ ‘한국전쟁’ ‘특별수사본부’ 등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프로그램으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곧 동아’라는 명성을 얻었다. 동아방송 국장을 지낸 최창봉 전 MBC 사장은 ‘나와 한국 방송’이라는 회고 글에서 “다큐멘터리는 동아방송의 성격에 맞는 방송을 위해 개국 초부터 일관해서 기획력과 제작 역량을 집중시켰던 분야”라고 설명했다.

오락 프로그램은 유쾌하면서도 결코 격조를 잃지 않았다. ‘모방하지 않는다’는 내부 제작 방침에 따라 다른 방송사와는 차별화한 프로그램만이 전파를 탔다.

음악과 토크가 어우러진 ‘유쾌한 응접실’은 오락 프로그램의 이정표였다. 양주동 박사 같은 석학과 지식인들이 고정 출연해 진지하고도 유쾌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유쾌한 응접실’은 1966년 1월부터 동아방송이 폐방되던 1980년까지 약 15년간 전국 프로그램 순위 3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동아방송이 만들어낸 유행어들은 방송의 청취권을 벗어나 전국에 퍼져나갔다. 개국 프로그램인 ‘안녕하십니까 구봉서입니다’가 낳은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됩니다’는 당시 억압적 상황을 빗댄 말로 인기를 끌었다. ‘이 사람을!’의 마무리 멘트인 ‘여러분 이 사람을!’도 회자됐다. 국민은 넋두리를 할 때 “나는 ‘이 사람’감이야”라고 말했다. 동아방송이 낳은 유행어는 ‘말장난’ 위주인 현재의 오락 프로그램과 달리 시대 풍자와 생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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