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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19>이혼 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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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19>이혼 러시

동아일보입력 2009-10-29 03:00수정 2009-10-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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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성과 연애로…
살림살이 어려워…”
근대로의 성장통
우리나라 최초 여성화가인 나혜석. 그는 이혼한 뒤 잡지에 ‘이혼고백서’를 발표해 파문을 일으켰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작년도 통계에 의하면 조선에서 결행된 이혼건수가 팔천이백이십여라 한다. 재작년의 육천구백구십일 건에 비하면 증가한 수가 일년에 천이백여 건이다… 소위 유산지식계급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이혼하고 무산하류계급에서는 여성이 남성을 이혼한다….”
―동아일보 1929년 10월 25일자 사설 중에서》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 현상의 하나가 이혼(離婚)이었다. 근대의 제도가 이식되고 신여성, 자유연애 등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사조가 유입되면서 나타난 풍경이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따르면 1917년과 1918년의 이혼 건수는 1만542건과 1만498건으로 1만 건을 넘기면서 일제강점기 최고를 기록했다. 이혼 건수의 결혼 건수에 대한 비율은 1910년대 7%였고 1920년대 이후에는 4% 안팎을 유지했다.

당시 이혼은 신문 사설이 비중 있게 다룰 정도로 큰 사회문제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은 파리에서 천도교 교령 최린과의 스캔들로 남편 김우영과 이혼한 뒤 1934년 잡지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공개 발표해 전 조선을 들끓게 했다. 그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개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본능적 사랑이었을 뿐’이었다고 했다.

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날로 늘어나는 이혼 소송의 대부분에 대해 “남편의 부족을 들어 여자 편에서 고소함이 다수”라며 경성지방법원에 제기된 사례들을 소개했다. 당시 이혼 사유의 상당수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경제적 곤궁을 해결하지 못한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여자가 이혼을 청구한 것이다. 독립운동 등 정치적인 이유로 만주로 간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가정이 파탄에 이른 사례도 많았다.

유산계급에서는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지적했듯이 남성 쪽의 이혼 청구가 많았다. 1920년대 도쿄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구시대 여성을 배우자로 둔 남자들이 신여성과 연애에 빠져 비롯된 현상이다. 1930년대에는 ‘제2 부인’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학업을 마친 신여성들이 적당한 상대를 찾지 못해 첩이나 후취로 들어감에 따라 이들을 ‘희생자’로 이해한 표현이다. 구여성과 그의 남편, 제2 부인이 된 신여성 모두가 시대의 희생자였다.

이혼이 급증하자 동아일보 1924년 신년 지상특집에는 각계 지식인과 저명인사 10명에게 ‘이혼 문제의 가부’를 묻는 기사가 10회 연재됐다. 이혼을 찬성하는 쪽에서는 “마음에 아니 맛는 부부간에는 누가 반대를 하던지 단연히 리혼을 하야서 양양한 전도를 그르치지 안는 것이 가할 줄로 안다”(방성옥)거나 “실흔 사람과 엇지 백복의 원인이 된다하는 부부가 되겟슴닛가”(방정환)라며 이혼 결행을 촉구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결혼 건수는 32만7000여 건, 이혼 건수는 11만6500여 건으로 결혼 건수 대비 이혼 비율은 약 35.6%다. 1900년대 초기에 비해 5∼9배로 늘었다. 세 쌍이 결혼하는 동안 한 쌍은 이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혼 사유(20년 이상 부부)는 성격차이(47.8%)가 경제문제(14.2%)를 훨씬 앞질러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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