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행락 개념마저 바꿨다

  • 입력 2009년 5월 28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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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양 도성 밖으로 행락을 나서는 모습을 그린 ‘동교행락(東郊行樂)’. 사진 제공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8세기 조선시대 양반들이 한양 도성 밖으로 행락을 나서는 모습을 그린 ‘동교행락(東郊行樂)’. 사진 제공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황기원 교수 “총독부 여행제한, 특정 장소에 인파 몰리기 시작”

행락(行樂)이라는 단어에선 행락철, 행락객, 행락시설 같은 단어와 북적거리는 인파, 무질서 같은 장면이 연상된다.

하지만 우리 조상이 즐겼던 전통적인 행락은 이런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황기원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최근 펴낸 연구서 ‘한국 행락문화의 변천과정’(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 “조선시대 사람들의 행락은 자연을 통한 성찰의 과정이었으며 자기 수련의 연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때 여행 통제 때문에 제한된 몇몇 공간으로 사람들이 몰렸고 단체 관광을 유도한 일제의 정책으로 행락의 행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행락 개념의 변화는 행락 장소의 변천사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한성부의 성 바깥에 있는 북악산, 인왕산, 낙산, 남산 등 내사산(內四山) 일대에서 주로 행락을 즐겼다. 황 교수는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고, 풍류 공간을 왕도(王都)인 성 안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는 이 가운데 삼청동, 인왕동 및 옥류동, 낙산 및 쌍계동, 백운동, 남산 및 청학동을 5대 명승지로 꼽았다. 계곡과 소나무 숲이 좋은 삼청동은 도성 사람들의 여름철 피서지였고 인왕산의 인왕동, 옥류동은 꽃놀이와 활쏘기 장소였다. 자하문 골짜기의 백운동에는 문인들이 모여 풍류를 즐겼다. 5대 명승지 외에 북한산 쪽의 우이동 계곡은 사찰이 많았으며 여자들의 행락 활동이 특히 활발했던 곳이다.

행락문화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변하기 시작했다. 황 교수는 가장 큰 특징으로 공원 문화의 등장을 들었다. 사대문 밖의 물가나 숲 대신 도성 내 공원이 행락 장소로 많이 이용됐던 것이다.

당시 언론 보도에는 ‘작일 오후 3시에 법무대신 고영희 씨가 중부 사동 공원 내에서 원유회를 설행하고 부관 임관 이상과 대심원 판검사 이하와 법관양성소장 근 60여 명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22일) 같은 기사가 눈에 띈다.

황 교수는 “공원은 공식행사의 장소로 사용됐고 일제강점기 때는 시민들의 꽃구경이나 피서지로 활용됐다”면서 “일제가 창경궁, 비원 등을 격하해 공원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겼다”고 말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선 이런 집단적 행락이 절정을 이뤘다. 1924년에는 봄꽃 구경이 한창인 4월의 일주일간 창경원 이용자가 15만여 명이었다. 당시 경성 인구는 36만 명이었다.

바가지 요금 같은 부작용도 이때부터 비롯됐다. 황 교수는 “행락지의 질서유지가 경찰의 주요한 일이었고, 당시 이미 행락지의 물가 단속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황 교수는 “자연과 하나가 되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락활동은 퇴색했다”면서 “의미 없이 인파 속에 밀려다니는 행락철의 피서객들, 심신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피곤하기만 한 단체관광 등 일제에 의해 왜곡된 모습은 아직까지 상당 부분 남아 있다”고 지적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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