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풍경 20선]<15>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 입력 2008년 9월 1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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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1930년대는 ‘연애의 시대’였다. 물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연애를 꿈꾸고, 연애의 대상을 찾아 헤매는 오늘날에 비하면 그때는 일부 소수의 사람만이 연애를 누렸다. 하지만 연애가 개인이나 사회에 미친 영향이나 자못 뜨겁게 전개된 연애 논쟁만을 놓고 보자면 단연 ‘연애의 시대’는 현재가 아니라 80, 90년 전 근대 조선 사회였다.”》

신여성-모던보이 ‘치명적 연애행각’

청춘남녀의 연애행각은 1930년대 경성에도 있었다.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유교적 규범이 수그러든 자리에 사랑과 연애를 적극 받아들였다. 1930년 7월 16일자 한 일간지의 기사를 보자.

“아이스컵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해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 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 먹는다. 그래도 모자라서 혀끗을 빳빳히 펴서 ‘아다시! 아이스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

이 책은 근대 조선에 충격을 던진 11가지 연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연애 사건으로 보는 우리 근대의 한 풍속도인 셈이다. 사랑에 울고 웃었던, 때로는 목숨까지 저버릴 정도로 치열했던 치정극의 실제 사례들이 담겼다.

외모와 능력을 따지는 계산적 연애를 앞세우는 요즘과 달리 당시 연애는 목숨을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정사(情死) 사건이다. 이 중 절세 기생 강명화의 음독자살은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표적인 사건이다. 부호의 아들 장병천을 사랑한 강명화는 기생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당하자 자신의 사랑에 대한 순수성을 증명하려 단발(斷髮)에 단지(斷指)까지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강명화는 장병천의 품에서 약을 먹고, 죽은 애인의 뒤를 이어 장병천도 쥐약을 입속에 털어 넣는다.

또 돈 때문에 열일곱의 나이에 마흔이 넘은 남자에게 시집갔다가 이혼한 뒤 카페 여급이 된 김봉자와 경성제대를 졸업한 유부남 의사 노병운의 비극적 정사는 1934년 인기 가수에 의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성 연인 관계였던 신여성인 김용주와 홍옥임의 동반 자살 등 파란만장한 연애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자살, 정사’로 분류되는 기사만 8000건이 넘을 정도로 당시 정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사랑에 미쳐 죽는 것을 ‘절대미의 극치’로 칭송했다. 비련의 사건은 상업적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김우진과 투신자살 직전에 남겼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은 최초로 10만 장을 돌파할 만큼 전례 없는 판매액을 올렸다.

자유연애를 부르짖은 신여성들은 대담한 선언으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외친 시인 김원주를 비롯해 정조란 오직 취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정조취미론’을 내세운 나혜석,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한 허정숙이 그 주인공이다.

이러한 발칙함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었을까. 저자가 쓴 대로 여성에게만 정조를 요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항거를 넘어 여성도 ‘이것저것 맛 좀 보자’는 주장은, ‘애욕의 순례자’라는 비난을 여성들에게서 듣기도 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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