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처가에 고깃배 사줬다고요? 하하…

  • 입력 2008년 4월 19일 0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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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객(刀客)이 있다. 색 바랜 흑색의 무복을 걸치고 거친 모래바람에 머리칼을 휘날리며 석양을 향해 묵묵히 걷는 도객.

그는 발도술의 천재도 아니요, 유서 깊은 문파의 절학을 익히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실전을 통해 배웠으며,‘한 번 베이면 두 번을 베어 이긴다’는 강철의 원칙 하나만으로 천하의 고수들을 찾아다녔다. 진로배의 아홉 영웅들도, 응씨배의 ‘미학파’ 오다케도 그의 무딘 칼날 앞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거울 앞에서 가슴을 열어젖히면 늘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열정이 악마처럼 웃었다. 그런 그에겐 평생 ‘야성’이란 단어가 주홍글씨처럼 따라붙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겨야 한다’를 노트에 적으며 약해져가는 승부 혼(魂)에 불을 지폈던 사람. 1972년 2단의 신분으로 당대의 거목 조남철을 꺾고 명인에 올랐음에도, 언제나 주머니엔 버스표 한 장과 자장면 한 그릇 값만을 넣어 다니던 자유인.

그의 이름은 서봉수다.

서봉수를 만났을 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이 정말 그 서봉수인가?’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독설에 가까웠던 언어는 외곽이 부드럽게 깎여 온기마저 느껴졌고, 둥근 유머와 여유를 부렸다. 입가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인터뷰를 하면서 서봉수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서봉수는 서봉수이되 과거의 서봉수가 아니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지금의 서봉수는 과거의 서봉수를 잊었다는 점이었다. 눈앞의 서봉수를 두고 혼란은 가중되었다.

서봉수 9단과 만난 곳은 강남구 반포동의 권갑용바둑도장에서였다.

그는 도장에서 프로를 지망하는 연구생들을 지도한다. 자신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운다’라고 말한다. 아이들과 두면서 천하의 서봉수가 바둑이 는다?

- 많이 변하셨습니다.

“그런가요? 많이 무뎌졌죠? 젊어서는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집념과 집착이 너무 강하다보니까, 그게 힘들었죠. 그 당시에는… 과거 기억을 잘 못하는 편인데, 여하튼 지는 게 힘들었어요. 바둑 두는 거 자체가, 이기든 지든 힘들었어요.”

지면 몸이 아팠다. 특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밤이면 잠들기가 어려웠다. 늘 긴장 속에서 살아서 그랬는지 가슴뼈가 툭하면 쑤셨다(그의 표현을 빌자면 ‘사슴뼈’가 아팠다). 대국 제한시간이 길어 바둑 한 판을 놓고 하루 종일 앉아 두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속기전이 많아져 다행히 이전 같은 육체의 고통은 줄어들었다.

- 젊어서는 세상의 하고많은 게임 중에 ‘바둑이 최고다’라고 하셨었죠. 지금도 그렇습니까?

“내가 그랬나요? 바둑을 좋아하긴 했죠. 그때는 밤을 새우면서 두고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힘든데. 괴로웠을 것 아닙니까? 타이틀 도전기, 이런 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마치 자신의 얘기를 남 얘기하듯 한다.

이혼을 겪으며 꽤 오래 ‘돌싱’으로 살았던 서봉수 9단은 지난 2004년 29세 연하인 베트남 처녀 람티히 무아씨와 재혼했다. 주변에서 들리는 얘기로는 깨가 서 말이라는데. 결혼 생활을 외부에 드러내기 싫어한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외곽’을 먼저 건드리기로 했다.

- 베트남에서 바둑대회도 여셨죠?

“작년에 한 번 했죠. 올해도 해야 하는데 요즘 대국이 많아요. 저쪽 사정도 있고, 그래서 못 가고 있습니다. 원래 처가에 가려고 했는데 누가 대회를 한 번 하자고 하더라고. 마침 한 기업체가 후원을 해줘서 호치민에서 대회를 열었죠. 베트남도 바둑 두는 사람들이 제법 됩니다. 난 애들을 많이 오게 하자고 했어요. 바둑을 보급하려면 아이들이 많이 둬야죠.”

- 처가 동네에 ‘환영! 서서방’이란 플래카드가 걸렸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하하, 아니에요. 대회장에 환영 플래카드가 붙은 게 와전됐군요. 처가는 바닷가에 있어요.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고 하죠. 처가에 고깃배를 선물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그건 아니구요. 필요한데 쓰시라고 1만불을 가져다드렸어요.”

이제 슬슬 결혼 생활을 물을 차례가 되었다.

- 부인께서는 한국말이 많이 느셨겠죠?

“많이 늘었어요. 간단한 건 하죠. 난 베트남말 전혀 못해요. 머리가 나빠서. 와이프랑은 한국말로 의사소통을 하죠. 요즘 일 다녀요. 본인이 심심하다고 어디 공장에 다니는 것 같던데. 거기 가면 베트남 친구들이 많으니까. 집사람은 베트남의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해요. 효녀죠. 스스로 돈을 벌어서 집에 부쳐주고 싶어 해요.”

- 부인께서 요리는 잘 하십니까?

“요즘 일 나가고부터는 거의 사 먹어요. 그 전에도 뭐 요리랄 것은 없고, 김치찌개 같은 걸 내가 해 먹었어요. 가정주부 생활한 지 한 10년은 넘은 거 같은데. 혼자서 오래 살았으니. 김치찌개를 좋아하니까 내가 그냥 물하고 김치, 양파, 두부 따위를 넣고 끓이죠. 그 친구(서9단은 와이프를 ‘그 친구’라고 호칭했다)가 혼자서 베트남 젓갈 같은 걸 담가놓기도 하는데, 입에 안 맞아서 난 안 먹어요. 그 친구는 한국음식 잘 먹어요. 특히 매운 걸 좋아하죠. 베트남 고추가 맵다고 하더라구요. 외국 생활이란 게 사실 음식이 제일 중요한데, 그 친구는 식생활에 문제가 없어서 다행이죠.”

- 부부싸움은 안 하고 사십니까?

“결혼 초기에 한 번 했나? 하루는 내가 옷을 입었는데, 그게 반바지였어요. 그런데 그거 말고 다른 걸 입으라고 하더군요. 크게 화를 냈죠. 옷 입는 건 내 자유지, 반바지 입는 거 갖고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했죠. 그 이후엔 없어요. 싸울 일도 없고.”

서봉수 9단과 대화할 때는 금기사항이 있다. ‘일생의 라이벌’을 떠나 ‘영원한 라이벌’로 불리는 조훈현 9단에 대해 묻는 것이다. 어차피 가정사도 언급한 마당에 다시 한 번 금기에 접근해 보기로 했다.

- 최근 전자랜드배 현무왕전 결승에서 조훈현 9단을 이기고 우승하셨죠? 모처럼 라이벌을 꺾은 기분이 어떻던가요?

“라이벌은 무슨 … 그 사람이 싫어할 텐데. 그 사람에게 있어 나는 ‘샌드백’이죠. 샌드백한테 무슨 라이벌. 그 사람은 늘 1등이고 난 2등이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슬그머니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두 사람이 마주하면 바둑판 위에 빙설이 쌓이는 듯 냉랭한 기류가 흐른다. 30년이 지난 지금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두 사람 간 상대전적은 조훈현이 243승 118패로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다. 객관적인 성적만 놓고 본다면 서9단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훈현의 전성기 시절, 서봉수는 한국바둑계의 유일한 대항마였다. 제왕의 전횡에 맞서 유일하게 칼을 뽑아 들었던, 야성의 무사였다.

-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오히려 서9단께서 조9단에게 6승 5패로 앞섭니다. 팬들은 지금 만약 두 분이 도전5번기를 벌인다면 어떨까 궁금해 하는데요.

“지금은 … 비슷할 거예요. 정식으로 승부 들어가면. 난 그렇게 생각해요. 단둘이 두게 된다면, 지금이라면 질 생각은 없죠.”

- 두 분은 예전부터 대국 후 복기를 안 하기로 유명하셨죠? 이유라도 있나요?

“그건 내가 안한 게 아니고, 조훈현이란 사람이 안한 거죠. 그 사람은 강자죠. 강자가 (복기를) 하면 하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그 사람이 택하는 거죠. 하수야 그냥 바라보고 있는 거지. 상대가 자기 적인데, 적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알려줄 수 있겠어요? 칼로 자기 목을 겨누는 건데, 그걸 가르쳐달라고 할 수 없죠. 하자고 말도 못했어요. 나는 늘 내가 하자고 하는 게 없어요. 남들 가는 대로 따라가는 거지. 복기도 상대가 원치 않으니까 하잔 소리를 안 한 것뿐입니다.”

서9단이 시계를 보더니 ‘아이들과 바둑 둘 시간’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 마디 한다.

“나는 언제라도 조훈현 9단이 손을 내밀면 마주잡을 마음이 있어요.”

인터뷰가 있던 며칠 뒤, 서봉수 9단이 감독을 맡고 있는 한국바둑리그 티브로드팀이 지난해 우승팀 영남일보에게 2연패 뒤 3연승을 거뒀다. 한 인터넷바둑사이트에는 서9단의 환한 얼굴과 함께 ‘기적이 일어났어요’라는 서9단의 말이 부제로 달려 있었다.

한국바둑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거론되어야 할 불멸의 이름 서봉수. 그는 과거를 잊었으나 팬들은 그의 과거를 누구보다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기억상실이란 것도 결국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더욱 강해지기 위한,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의도적 작업이 아니었을까. 바탕화면 앞에 앉아 휴지통 속의 기억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지금 이 순간도 최후의 ‘Delete’ 키를 만지작거리고 있을지 모른다.

야인의 말말말…

서봉수 9단은 젊은 시절 ‘반상의 철학자’로 불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성, 혜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사물의 본질을 단숨에 꿰뚫는 촌철살인의 통렬함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대부분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해 “내가 그랬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로 일관했다. 그는 잊었을지 몰라도, 팬들 기억 속의 ‘서봉수표 어록’들은 영원히 남아 그를 추억하게 만들 것이다.

“조훈현은 나의 스승이었다.”

“바둑이란 나무 위에 돌을 놓는 것일 뿐이다.”

“일류와 삼류의 차이를 나는 모른다. 아니, 전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존경이란 강아지가 먹이를 주는 주인에게 바치는 감사표시이다.”

“프로가 주어진 시간을 다 활용하지 않고 패배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바둑의 핵에 가장 가깝게 근접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면 아마도 이창호일 것이다”

“속기는 프로를 광대로 만든다.”

“인생 40 이후는 리바이벌이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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