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읽는 세상]십장생도를 바라보며

  • 입력 2008년 2월 5일 03시 00분


長生, 꿈으로 붙잡는 세월

모를 일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삶이란/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지나갈 수 있는 길’(황지우의 ‘길’)이라 생각하고,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신경림의 ‘갈대’)고 고백하며, ‘생의 반은/이미 떠나버린 협궤열차와 같이 지나갔다/고집스럽게 구두 뒤축에 달라붙는 기억을 끌어안고/남은 반생은 어떻게 살 것인가’(장석주의 ‘여행길’)라고 한탄한다. 시인이 아니라도 삶이 모질고 인생이 폭풍우 치는 바다란 건 대개 다 안다.

한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대로 아무리 고달파도 고통의 바다를 쉬 떠나고 싶지 않은 것도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오래 살고 싶다는 건 그래서 인간의 가장 간절하고 오래된 소망이리라.

해 산 물 돌 소나무 달(혹은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을 가리키는 십장생(十長生). ‘불로장생’의 기원을 담은 그 ‘십장생도’가 왕실부터 민초까지 우리 조상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그림이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선인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정초에 그림을 나누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십장생은 한 해 동안 행운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세화(歲畵)의 소재로도 즐겨 등장했다.

설을 앞두고 ‘십장생도’를 주제로 두툼한 화집을 펴낸 서양화가 오승우(78). 예술원 회원인 그가 이달 말 7년 만에 여는 개인전의 주제도 전통적인 십장생이다. 서양화로 재해석된 동방의 십장생은 전통 그대로의 답습과 거리가 멀다. 화폭 가득 화려한 색채와 활달한 붓질. 인생을 긍정하는 즐겁고 유쾌한 기운이 전해오는 듯하다. 날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하루 7, 8시간씩 꾸준히 그림에 몰두하는 노화가의 십장생에는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아이들 그림 같은 천진난만함이 동시에 숨쉬고 있다.

또 하나의 십장생도가 충무아트홀(02-2230-6600)의 ‘이서지-신(新)민화전’에서 보인다. 강렬한 색채에 단순화한 이미지가 어우러진 현대적 민화풍 십장생도. 화가 이서지(74)는 이전의 풍속화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화가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있으면 노인이 아니다. 내겐 꿈이 있다”고 얘기한다.

나이 먹는 것과 마음의 젊음을 간직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꿈과 열정이 있는지, 우리가 잃은 모든 것마다 얻은 것이 있음을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차이가 아닐까. 삐쩍 마른 조각상으로 널리 알려진 스위스 태생의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는 세상 떠나기 2년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젊음이란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동년배들은 늙은이들이지만 난 젊어요. 그 친구들은 과거를 받아들인 거지요. 그들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삶을 삽니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삶을 삽니다. 바로 지금 나는 나만의 작품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거든요.” 인생은 세월과 함께 녹슬어 가다 어느 순간 폐기되는 협궤선로가 아니라 어쩌면 매순간 높고 낮게 운신하며 새로운 풍경을 향해 끝없이 순환하는 회전목마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깨달음을 배운다.

설 연휴는 코앞, 한 살 더 먹는 것을 더 이상은 미뤄 낼 수 없는 시간에 닿았다. 이제 떡국 생각은 나지 않고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는 나를 바라본다. 십장생도가 일상 속에 숨쉬던 시절보다 수명은 늘었으나 나이 먹는 일을 더 두려워하는 현대 사회. ‘나이는 사람을 내면으로 파고들게 해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유발하는 심리적 문화적 질병’이라고도 하고, ‘오래 산다고 좋은 인생이 아니고 잘 살아야 장수’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선택은 우리 몫이다. 나이 앞에 굴복하거나 극복하거나….

해와 달 그리고 땅 위 모든 생명이 혼융일체, 저마다의 목숨과 몸짓으로 연주하는 저 오케스트라의 한 장면. 시간과 공간 모두 까마득한 십장생도를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가듯이 바라보라. 그리고 아침을 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는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서)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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