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 ‘조선후기 여성지성사’ 펴내

  • 입력 2007년 9월 4일 03시 05분


코멘트
정년퇴임 전 마지막 저술로 ‘조선후기 여성지성사’를 펴낸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 그는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어머니(최은희 여사)”라고 말한다. 신원건 기자
정년퇴임 전 마지막 저술로 ‘조선후기 여성지성사’를 펴낸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 그는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어머니(최은희 여사)”라고 말한다. 신원건 기자
조선후기 최고 명문가를 친가와 시댁으로 둔 김호연재(1681∼1722). 그녀는 사대부 남편들이 아내에게 써 주기 마련인 ‘부훈서(婦訓書)’를 직접 쓸 만큼 학문이 깊었다. 스스로를 일깨운다는 뜻으로 ‘자경편(自警編)’이란 제목을 달았지만 실제 내용은 남성 사대부에 대한 비판이 가득하다.

“여성은 남성을 행 불행의 축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며 여성의 독자적 삶을 강조하는가 하면 “첩은 크게 집을 어지럽히는 근본”이라며 칠거지악으로 비판돼 온 투기의 원인 제공자로서 남편을 비판한다. 이는 “100명의 첩을 두어도 본체만체하고 첩을 아무리 사랑하여도 노여워하는 기색을 두지 말고 더욱 공경하라”라는 우암 송시열이 쓴 부훈서에 대한 정면반박이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꼽히는 녹문 임성주의 여동생 임윤지당(1721∼1793). ‘이기심성설’ 등의 글을 통해 오빠의 이기일원론을 독자적으로 소화한 그녀는 주 문왕의 어머니와 아내인 태임, 태사의 사례를 들어 성인의 경지는 남녀를 불문하고 도달할 수 있다는 논지를 펼쳤다.

지난달 정년퇴임한 이혜순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펴낸 ‘조선후기 여성지성사’(이화여대 출판부)의 내용이다. 이 책은 문학과 예술의 범주에서만 맴돌던 조선시대 여성의 사유를 지성사의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저술이다.

이 책에서 다뤄진 여성들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와 같은 예술가의 틀을 벗어나 유교이론에 입각해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조선 사대부의 사상과 대결을 펼친 이들이다. 남편을 훈계하는 척독(쪽지편지)을 통해 독자적 예론(禮論)을 펼쳤던 강정일당, 태교에서 남편의 동등한 책임을 강조한 ‘태교신기’의 저자 이사주당, 여성의 가사활동 영역을 집 밖 경제활동까지 확장한 ‘규합총서’의 저자 이빙허각, 사대부 남성이 독점하던 산수유람과 문학창작 및 비평 활동에 대한 여성의 동등한 참여를 주장한 김금원, 김경춘 자매 등이다.

서울대에서 국문학 학사,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비교문학 석사, 국립대만사범대에서 중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1973년부터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 한문학을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연구해 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자신의 말처럼 “도적놈들의 이야기인 ‘수호전’과 역시 남자로만 구성된 연행사와 조선통신사 같은 남성들의 글”이었다.

“수호전의 무대인 양산박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여성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양산박에 미래가 없던 이유입니다. 조선시대 연행사나 통신사 일행 중에도 여성이 한 명도 없었기에 여성은 글쓰기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머물고 맙니다.”

그런 이 교수가 여성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10년 전 이화여대 한국어문학연구소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당시 첫 연구 프로젝트였던 한국여성고전작가 연구는, 그가 초대 회장을 맡은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탄생으로 이어지며 심화됐고, 지성사로 발전해 갔다.

“물론 그들의 유학사상이 퇴계나 율곡 같은 깊이를 갖춘 것도 아니었고 학맥을 형성해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유학사상을 여성의 시각에서 주체적으로 소화해 낸 글들 속에서 내적으로 축적된 지성의 기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교수는 최근 국문학사에서 여성문학사가 독립된 장으로 편입되고 있듯이 이번 책을 계기로 삼아 한국사상사에서도 여성사상사가 다뤄질 날이 오도록 후학들의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했다.

한국고전문학회, 한국한문학회, 국어국문학회의 첫 여성회장을 지낸 이 교수는 한국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여사의 1남 2녀 중 막내딸이다. 이 교수는 “제가 막내라서 어머니가 여성단체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가 ‘그게 뒤늦게 약발을 발휘하는구나’ 하고 호호 웃고 계실 것 같다”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