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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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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살아있다]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하)

입력 2007-07-19 14:15수정 2009-09-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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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출병’을 둘러싼 대만, 일본인 연구자의 이야기에 파이원족 주민들이 열심히 귀 기울이고 있다=대만 둥관(屏東)현 무딴(牡丹)마을에서, 가타쿠라 요시후미(片倉佳史) 촬영

무딴(牡丹)마을 입구에 있는 문 윗부분에는, 일본 군에 저항하는 파이원족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대만 둥관(屏東)현 무딴(牡丹)마을에서, 가타쿠라 요시후미(片倉佳史) 촬영


고종(高宗1852-1919년) 12세에 조선 왕조 제 26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아버지인 대원군과는 반대로 개화 정책을 실시. 서양 문명을 받아 들이려 하여, 궁전에도 일찍이 전기를 도입했다. 정무가 주로 저녁 이후 등으로 야간형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리훙장(李鴻章 1823-1901년) 청조 말기의 정치가이다. 공업 진흥을 추진한 “양무 운동”의 주도자이기도 했다. 외교에서는 타협하는 일이 많아, 국내의 반대파에게는 “연약 외교”라 불리어 졌다.

유신으로 혼란스런 가운데 왜 대만 출병을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에도 막부와 각각의 번이 통치하고 있던 정치 체제를 무너 뜨리고, 새로운 중앙 집권 국가가 여러가지 개혁을 행한 것을 말한다. 폐번치현(廃藩置県 번의 폐지, 현의 설치)과, 구미를 모델로 한 징병 제도, 식산 흥업 정책이 도입되었으며, 그 외에 교육 제도와 세금 제도도 발본적으로 바꾸어, 근대적인 국가 형성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주변국에도 자극을 주었다. 예를 들어, 중국(당시, 청나라)에서는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 후, 캉유웨이(康有為) 등이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정부 기구의 개혁과 인재등용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103일만에 좌절되고 말아 “백일 유신”이라고도 불린다.

메이지 유신은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산업과 인재를 길러 중앙집권국가를 만들고자 한 국내개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후에 군국주의로 이어지는 해외 출병이다. 전자의 국내개혁은 중국과 조선도 배우게 되지만, 후자는 동아시아를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

일본이 국내 개혁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해외 침략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대만으로 향했다. 근대 일본에 있어서 최초의 해외 파병은 한반도도 중국 대륙도 아닌, 당시 “세다이(征台)의 에키(役)”라고 불리던 대만 출병이었다.

6월 4일, 대만 남부의 무딴(牡丹) 마을(출병 당시는 무딴사(牡丹社))은 눈부신 남국의 햇살 아래에 있었다. 1874년 5월, 유신의 영웅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생인 육군 중장 사이고 쓰구미치(西郷従道)가 인솔하는 3600명의 일본군이 이곳으로 쳐들어 왔다.

이번 취재 중에 때마침 대만 출병을 회고하는 심포지엄이 무단에서 열리고 있었다. 현지의 관공서가 주최한 행사로 100여명의 참석자 중에는 원색의 민속 의상을 입은 선주민 파이원족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조상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전쟁의 진상을 알고 싶어 모인 것이었다.

파이원족인 리찐쇼이(李金水 87세) 씨는 조부로부터 싸웠던 경험을 들으면서 자랐다. “산 위에서 총으로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총알이 떨어진 잠시 후, 쓰러졌다고 생각했던 일본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 당황한 나머지 서둘러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는 거의 잊혀져 버렸지만, 대만에서는 어떨까.

역시 파이원족이며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두시윤(杜詩韻 33세) 씨는 대학 시절 노인들에게 증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알고 있어도 입을 굳게 닫을 뿐…”

1949년,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쳐 왔다. 그 정권 하에서 선주민족의 역사는 어둠 속에 매장당해 버렸다. 민주화가 진행된 지금에서야 겨우 그 지워진 역사에 빛을 비추려는 기운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군은 왜 대만에 출병했을까? 발단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미야코(宮古島)섬의 공무원 등을 살해 / ‘정벌’ 을 명목으로 출병

류큐(琉球 지금의 오키나와현(沖縄県)) 미야코섬의 공무원 등 69명이 탄 배가 악천후 때문에 대만에 표류하게 되었다. 그 중 54명이 파이원족에게 살해 당했다. “정중한 대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현지에는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생각은 달랐다. 살해자들을 응징하고, 잘하면 그곳을 일본이 소유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출병이 행해 졌다.

정부 내에서는 반대론이 적지 않았다. 실력자의 한 명인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는 항의의 표시로 참의라는 정책결정직을 그만 두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야말로 무모한 출병이었다. 전투에서 일본 측의 사망자는 12명이었으나, 말라리아 등으로 500명 이상이 병사했다. 사전 조사가 불충분했을 뿐 아니라 군의관과 의약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대를 항복시켰다고는 해도, 현지의 군간부가 “너무나 비참해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 편지에 쓸 정도였다.

무엇보다, 대만은 중국(당시, 청나라)의 영토였다. 그곳에 출병을 하면, 청이 잠자코 있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20년 빨리 청일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왜 출병을 단행한 것일까.

이 의문을 연구해 온 오사카(大阪) 시립대 명예교수인 모리 도시히코(毛利敏彦) 씨는 당시의 최고 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오쿠보는 출병하기 전에 “정한론(征韓論)”(키워드 참조)을 둘러 싼 정변으로 실권을 쥐었다. 하지만 큰 오산이 있었다”고 모리 씨는 말한다. 같은 가고시마 출신의 맹우로 덕망이 높았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오쿠보와 대립하여, 참의(参議)를 그만 두고 고향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인기가 없는 정권이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것은 내정보다는 외정이다. 당시에도 이미 대만 출병은 검토되고 있었다. “오쿠보는 하는 수 없이 출병을 추인한 것이라 전해지지만, 시종일관 출병에는 적극적이었다”는 것이 모리 씨의 설이다.

한편, 발의한지 얼마되지 않은 징병령에 대해 병역을 싫어하는 농민들이 일치단결하여 격렬한 반대 운동을 일으켰던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징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가 대외 전쟁으로 기울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농민만이 아니다. 정한론의 정변에 분노한 고치현(高知県)의 사족(士族 메이지 유신 후, 무사 계급에게 부여된 칭호)이 오쿠보와 함께 정부를 좌지우지하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습격한 사건이 일어 났다. 드디어 불만을 밖으로 돌리지 않으면 정권이 위험에 빠질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불만을 표시하는 사족 중에서 최강을 자랑하는 가고시마(鹿児島)의 사쓰마번(薩摩閥)은 “대만 정벌”에 열심이었다. 사쓰마는 에도 시대 초기부터 류큐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들 류큐 주민들에 대한 살해 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사이고 다카모리 휘하의 300명 정도가 대만 출병에 참가하였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류큐는 청에도 사절을 보내어 중국과 일본의 ‘양속(両属)’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또한 청과의 대립점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배상금 지불한 청 / 전쟁의 ‘불씨’가 되다

중국 텐진 사회과학원에서 일본 연구소장으로 근무한 뤼완흐어(呂万和) 씨는 “매우 모험적인 군사 행동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오쿠보는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오쿠보는 베이징에 가서 청과의 교섭에 임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일기(大久保利通日記)』 등에서 경과를 살펴 보면, 난항을 겪은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만국 공법(국제법)에 비춰 봤을 때, 출병지에 청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다”, “아니 청나라 식의 방식으로 통치하고 있다.” 라고, 프랑스인 법률고문인 보아소나드(Boissonade)의 지혜를 빌려 국제법에 의거해 논지를 펼친 오쿠보에 대항하여 청은 “청일 수호 조약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라고 반박하였다.

청일수호조약은 그 전년에 발효되어 아직 얼마되지 않은 조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구미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던 일본과 청으로서는 처음으로 맺은 대등한 조약으로, 서로의 국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결국, 현지 영국 공사의 중재로 청이 50 만량을 지불하고 일본의 출병을 “백성을 보호하는 의거”였다고 인정하는 대신에, 일본은 철병했다. “청나라 정부는 군사 행동도 둔했고, 외교력도 약했다. 오쿠보는 교섭을 통해 실패를 승리로 바꾸어, 명예를 만회했다”고 뤼완흐어는 말한다.

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일본을 같은 편으로 끌어 들이면, 구미에 대항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청일수호조약 체결을 진행했던 실력자 리훙장(李鴻章)은 “구미는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득히 먼 곳에 있지만, 일본은 대문앞에서 우리를 엿보고 있다. 중국에게는 영원히 큰 근심거리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청은 일본을 가상 적국으로 간주하고 군비 확충을 서둘렀다. 모리씨의 말을 빌리면, “이 시점에서 청일 전쟁의 불씨가 생긴 것”이 된다.

청에 입장에서는 류큐인을 일본의 ‘백성’이라고 인정했던 것이 최대의 실패였다. 일본 정부는 그 다음해부터 청에게 바치는 조공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류큐에 내렸고, 4년 후에는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바꾼다. 완벽하게 일본의 일부로 삼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과 종속 관계를 맺어 온 류큐가 화이질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중화 체제가 붕괴해 가는 첫 단계라는 의미가 크다”고 오키나와 대학의 마타요시 세이쿄(又吉盛清) 교수는 말한다.

당시 중국에서도 조공국이 전부 무너져 간다고 위기감을 가진 사람은 있었다. 청일수호조약에 의거하여 청나라에서 부임해 온 초대 일본 공사인 허루장(何如璋)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본국에 보냈다.

“류큐가 망하면,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다음은 조선 / 포대를 군함이 도발

그것은 현실이 되고 있었다. 그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서울로 향했다.

인천 국제공항은 영종도에 있다. 1875년 9월, 이 섬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30여명의 주민이 살해당했다. 근처 강화도에 있던 포대를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도발해, 포격전이 벌어졌던 것이 그 계기였다.

이 강화도 사건(한국에서는 운요호사건)을 이유로, 일본은 조선에 한일수호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맺게 하고 개국을 강요하였다. 일찌기 일본이 미국의 페리 함대에게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조선에게 했던 것이다.

강화도도 당시와는 모습이 바뀌었다. 운요호를 공격한 포대의 흔적인 ‘초지진’은 전망대가 되어 있었다. 관광 버스와 승용차가 끊임없이 들어 왔다. 문화 관광 해설가인 박성옥(朴成玉) 씨는 “여기는 한국이 근대와 만난 장소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가까운 관광지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강화도 사건에 대해, 근년에 새로운 발견이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운요호 함장의 보고서보다 더 먼저 쓰여진 함장의 보고서가 일본의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운요호는 물 보급을 목적으로 접근하였고, 일장기를 달고 있었음에도 포격을 당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보고서에 따른 일본 측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보고서에는 물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새로운 역사 자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 이태진(李泰鎮)울대(서울대) 교수를 만나 보았다.

“지금까지의 보고서는 사실 관계를 알고 싶어 하는 영국 공사를 만나기 전날에 고쳐 쓴 것입니다. 다음날에는 프랑스 공사에게도 보여주었습니다. 조선은 국제법도 모르는 야만스러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심어, 영국과 프랑스를 아군으로 삼고 싶었겠지요. 조약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공작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일본 정부에는 보아소나드(Boissonade) 뿐만 아니라, 프랑스계 미국인인 르장드르(Le Gendre)처럼 대만출병 시에 “장래에 일본이 대만을 영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는 등의 바람을 넣은 외국인 고문도 있었다.

이 교수는 앞에서 이야기한 강화도사건과 조약에 관한 정설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쇄국 정책을 펴던 조선을 일본이 개국시켜 혜택을 주었다는 것은 그 후에 한국병합을 강행했던 일본 측의 주장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강화도사건이 있기 2년 전, 당시 22세가 된 조선 국왕 고종은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국제 대응에 능숙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 개국은 피할 수 없다. 고종은 그런 개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 교수는 지적한다. 또한 “고종은 개화에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조약 체결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선에는 개국 의사가 있어으며, 쌍방의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 강화도 조약(한일수호조약)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의 대립은 차치하더라도, 조약을 맺을 때는 합의가 있었다는 취지이다.

조약에는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뒷날 청일전쟁(중국에서는 갑오중일전쟁) 개전의 구실이 된다. 청일전쟁에 대해서는 다음번 특집에서 다루기로 한다.

▼정한론 征韓論

조선에 파병하여 정복한다, 또는 조선에 정치 체제의 변혁을 강요하려는 주장. 에도 막부 말기와 메이지 초기에 정부 안팎에서 논의되었다. 메이지 신 정부가 들어 서자, 조선 측은 일본으로부터의 외교 문서가 막부 시대의 형식과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국교를 거절하였다. 게다가 1873년 5월, 조선이 부산에 있던 일본 측의 체재용 시설의 문 앞에 일본을 모욕하는 글을 게시했다는 보고가 전해 졌고, 참의(参議)였던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내각 회의에서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파병을 주장하였다. 한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는 파병에 반대하며 자신을 대사로 파견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이타가키 등이 찬성하여 일단, 사이고의 파견이 결정되었으나, 천황에게 결정 사항을 보고한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가 파견을 인정하지 않도록 요구한 관계로, 내각 회의에서 정식 결정되었으나, 파견이 중지되는 이상사태가 발생하였다.

(구마모토 신이치 隈元信一, 니시 마사유키 西正之, 사토 가즈오 佐藤和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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