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한국역사]<2>고구려-백제 城의 비밀

  • 입력 2007년 4월 7일 02시 59분


코멘트
중국 지린 성 지안 시에 위치한 환도성의 잔해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벽. 평지 성인 국내성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지린 성 지안 시에 위치한 환도성의 잔해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성벽. 평지 성인 국내성의 방어용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랴오닝 성 환런 시의 오녀산성. 해발 800m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국 랴오닝 성 환런 시의 오녀산성. 해발 800m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고구려 당시 기록인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따르면 주몽은 ‘강을 건너서 비류골의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했다’고 했다. 즉 고구려의 첫 수도는 홀본 서쪽의 산성이다. ‘삼국유사’는 고구려의 첫 수도를 졸본성(卒本城)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은 고구려의 첫 수도를 흘승골성(紇昇骨城)이라 했다. ‘삼국사기’지리지도 ‘위서’에 따라 고구려의 첫 수도를 흘승골성이라 기록했다. 그러면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졸본)은 지금의 어디일까?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한자 표기 이전의 순수한 고구려말과 백제말로는 왕(王)을 ‘우루’ 또는 ‘우라’로 호칭했고, 왕비를 ‘우룩’으로 호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녀산성은 ‘우루산성’으로 왕산성(王山城)을 뜻한다.

고대에는 왕이 사는 곳이 수도이므로 고구려의 첫 수도는 왕(王)산성, 황(皇)산성의 뜻을 가진 오녀산성(우루산성)임이 명백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이를 랴오허(遼河)의 지류인 소자하 상류, 지금의 중국 랴오닝(遼寧) 성 싱징(興京) 일대로 비정(比定·비교하여 정함)했다.

현대 한국 역사학자들은 대개 랴오닝 성 환런(桓仁)시 오녀산성(五女山城)을 홀본(졸본)성이라고 추정한다. 물론 확증은 없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일부는 이 견해에 강력히 반대한다.

환런 지역이 비교적 평지인 데 비해 오녀산성은 해발 806m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서쪽, 북쪽, 동북쪽의 대부분은 깎아지른 수십 m의 절벽을 이뤄 동쪽, 동남쪽과 그 밖의 절벽 사이에 성을 쌓은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다.

1985년 오녀산에 텔레비전 송신탑을 세울 때 많은 유물이 출토된 이후 중국 측이 먼저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최근에는 한국 측도 발굴조사를 시행했다. 발굴된 유물들은 토기, 석기, 청동기, 철기, 각종 용구 등이 모두 층위별로 나와 이곳이 고조선·고구려 계열의 요새 또는 제사의례의 터전이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고고유물만 놓고 봤을 때 이곳이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성임이 명백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 고구려 첫 수도 홀본성의 중국표기 오녀산성

문제를 푸는 열쇠는 오녀산성의 명칭 속에 숨어 있다. 오녀(五女) 산의 별칭은 고려시대 오로산(五老山), 오룡산(五龍山), 올라산(兀羅山), 우라산(于羅山), 오여산(五餘山) 등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고구려 발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스웨덴의 고대중국어학자 버나드 칼그렌의 고대한음(漢音) 연구에 따르면, 오녀(五女) 오로(五老) 오룡(五龍) 올라(兀羅) 우라(于羅) 오여(五餘)의 공통발음은 ‘우루’ 또는 ‘우라’이다.

오녀는 우루(五→우, 女→루 또는 뉴), 오로는 우라우(五→우, 老→라우)다. 오룡은 우룽 또는 우류(五→우, 龍→룽 또는 류), 올라는 우라(兀→우, 羅→라 또는 나)다. 우라는 말할 것도 없다. 오여는 우루(五→우, 餘→루 또는 유)다. 고대발음으로 모두 우루 또는 우라의 한자 발음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우루 또는 우라는 무슨 뜻인가. ‘양서(梁書)’ 백제전에 ‘백제는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고 기록했으므로, 백제말에서 이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주서(周書)’ 백제전에서는 ‘왕의 성은 부여(夫餘) 씨로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며 백성들은 건길지(건吉之)라고 부르니 중국말로 모두 왕이란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於陸)이라고 호칭하니 왕비라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라(於羅)의 고대 중국어 발음은 우라(於→우 또는 우오, 羅→라 또는 로)다. 하(瑕)는 고위 관직에 대한 존대어다. 어륙(於陸)의 고대음은 우룩(於→우 또는 우오, 陸→룩)이다.

즉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한자 표기 이전의 순수한 고구려말과 백제말로는 왕을 ‘우루’ 또는 ‘우라’로 호칭했고, 왕비를 ‘우룩’으로 호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녀산성은 ‘우루산성’으로 왕산성(王山城)을 뜻한다. 고대에는 왕이 사는 곳이 수도이므로, 고구려의 첫 수도는 왕(王)산성, 황(皇)산성의 뜻을 가진 오녀산성(우루산성)임이 명백한 것이다.

언어의 공동성이 민족형성의 제1차 요인임을 고려할 때 이는 고구려가 고조선→한국민족 계열이고, 중국계열이 아님을 명백히 입증한다. 우루는 현대 한국말의 어른, 우(임금의 뜻), 위(上)와 모두 같은 계열의 어휘이다.

고구려말과 백제말에서 왕이 우루 또는 우라였다는 열쇠는 고구려 역사와 백제 역사에서 종래 풀지 못했던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준다.

○ 고구려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의 방어성인 환도성

고구려의 국력과 강역이 확대됨에 따라 첫 수도 오녀산성은 비좁고 추운 수도로 감지됐다.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은 졸본천 부근 평지에 별궁을 지어 이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결국 유리왕 22년(서기 3년)에 지금의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의 국내성(國內城)으로 수도를 옮겼다.

유리왕은 평지 성으로 국내성을 쌓음과 동시에 2.5km 떨어진 바위산에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환도성(丸都城)으로 비정된다. 이 두 성을 하나로 연결하여 고구려의 제2기 수도인 국내위나암성이 됐다. 위나암성은 오녀산성처럼 천연의 요새를 활용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이해된다.

국내위나암성 명칭에서 국내(國內)와 암성(巖城)은 한자 뜻 표기이고, 위나(尉那)는 고구려말의 발음한자 표기다. 위(尉)의 고대음은 ‘우, 우웨이’이고, 나(那)는 ‘나, 라’이다. 즉 위나(尉那)의 고대발음은 ‘우라’ 곧 왕(王) 또는 황(皇)의 뜻을 가진 고구려말이다. 그러므로 위나암성은 한문자로 왕암성(王巖城) 또는 황암성(皇巖城)의 뜻이다.

고구려 산상왕 13년(209년)에 외부의 침입을 염려하여 일시 위나암성으로 수도를 옮긴 일이 있었는데, 후대에 한자로 이를 환도성(丸都城)으로 표기했다. 또 고구려 11대 동천왕과 16대 고국원왕 때 각각 관구검과 모용황의 침략으로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된 뒤 동쪽으로 옮겨 임시수도로 삼은 성은 동황성(東黃城)으로 표기했다. 위나(尉那)는 우라로서 중국인들이 황제에게만 쓰는 황(皇)자의 의미를 지니므로 그 유사음인 환(丸)자나 황(黃)자로 교체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황도성(皇都城)→환도성(丸都城), 동황성(東皇城)→동황성(東黃城)으로 변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위나암성은 결국 오녀산성과 마찬가지로 순 고구려어 우라암성의 한자 음차이며 한자로는 ‘황도암성(皇都巖城)’을 뜻한다.

○ 백제 첫 수도 위례성

백제말 우루, 우라를 이번엔 백제에 적용해 보자. ‘삼국사기’는 기원전 18년 온조가 한강을 끼고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여 백제(처음 이름인 십제·十濟)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하남(河南)은 ‘한강 이남’의 한자표기이고 위례는 백제말의 발음 한자표기다. 그러면 위례는 무슨 뜻인가. 위(慰)의 고대음은 ‘우’이고 례(禮)의 고대음은 ‘리, 라이, 레이’다. 즉 위례는 우리 또는 우라와 같이 왕 또는 황을 뜻한다. 따라서 위례성(慰禮城)은 왕성 또는 황성을 뜻한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의 당시 기사가 이를 명료하게 증명한다. 일본서기 웅략기 20년 겨울조는 ‘백제기(百濟紀)에서 이르기를, 개로왕 을묘년(475년) 겨울, 맥(貊·고구려)의 대군이 와서 대성을 공격한 지 7일 7야에 왕성(王城)이 함락돼 드디어 위례(尉禮)를 잃었다. 국왕과 대후 및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고 인용했다. 여기서 왕성이 곧 위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온조왕 때 한강도 우리하(郁里河)로 표기한 적이 있는데, 이것도 왕성(王城)의 강이란 뜻이라고 본다.

한강 이남에 하남위례성이 있었다면, 한강 이북엔 하북위례성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구태여 하남을 강조해 넣지 않았을까.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비문에 영락 6년(396년) 광개토대왕이 남진해 한강에 이르러 백제의 58개성을 빼앗은 공적을 기록한 가운데 우루성(于婁城)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지금까지 논의에 따르면 이는 왕성·황성을 뜻하는 백제·고구려말인 만큼 이 성이 바로 하북위례성일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우루산성) 및 다음 수도 위나암성(우라암성)과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 및 우루성이 모두 왕성·황성을 이르는 고구려·백제말 한자 발음 표기였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한 나라였고 현대 한국의 직계 조상국가였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